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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t & Found

부서질 때까지 주는 사랑

by pomme

어제 면접을 보고 일어나는 오늘 아침, 왜인지 울적했다.

긴장을 너무 많이 했던 게 아쉬웠을까,

답을 떠먹여줬는데도 못해서 자꾸 생각이 나는걸까,

아니면 조금 지친걸까.


그래서 바다를 보러 떠났다.

이것저것 할일을 하나씩 해치우고 잠시 유튜브를 봤다.

무슨 알고리즘인지는 몰라도 유튜브는 내게 초록색 뜨개 인형 공룡 영상 하나를 추천해줬다.





영화는 귀여운 공룡 인형과 여우 인형이 노는 모습을 비추며 시작되었다.

하지만 여우 인형은 물에 빠져버리고, 물에 젖어 점점 무거워지는 탓에 좀처럼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 모습을 멀리서 본 공룡 인형은 한걸음에 달려간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는지 알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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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아래를 뛰어내리다 못에 걸리고 만다.

못에 걸린 뜨개 인형은 한올 한올 풀려간다.

그런데도 공룡은 멈추지 않는다.

실이 더 빠르게 풀려가는 것을 알지만 실을 더 팽팽하게 하기 위해 지그재그로 뛰어가며 의자 다리 사이 사이에 실을 걸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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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여우는 다른 계획을 세운다.

여우는 돌을 던져 문을 괴고 있던 막대기를 쓰러뜨린다.

문을 닫아버려서 공룡이 자기를 구하러 오지 못하게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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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한 공룡은 이제껏 앞만 보고 달리다가 뒤를 돌아본다.

실은 어느새 많이 풀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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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공룡은 고개를 다시 돌려 창호지를 뚫고, 기어이 여우가 있는 방으로 들어온다.

이제 공룡은 팔도 몸통도 없다.

간신히 남은 다리 하나로 콩콩거리며 달려간다.

우물 앞의 턱에서 자신을 내던진 공룡.

실은 빠르게 풀리며 공룡은 마침내 소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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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풀린 실의 끝자락은 다행히 우물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물에 젖은 실은 우물의 깊은 곳으로 내려와 여우에게 닿는다.

여우는 실을 잡고, 공룡이 여기저기 걸어놓은 실은 팽팽히 여우를 당긴다.

여우는 마침내 우물 밖으로 나와 공룡이 남긴 초록색 실을 소중히 끌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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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돌아오는 길 위의 실과 솜을 고이 모아서 보금자리로 돌아온다.

영화는 여우가 모은 실과 솜으로 뜨개질을 하는 모습을 비추며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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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리뷰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 나를 나답게 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나의 자아가 죽을 준비가 되었을 때 사랑이 비로소 시작된다.

상대를 위해 나의 고집을 꺾을 준비, 기꺼이 나의 자아가 죽을 준비가 되었을 때에서야 진정 사랑이 시작되고, 그랬을 때 나의 자아는 죽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다시 생겨나는 것이라고.





영화를 보고, 리뷰한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M을 참 많이 떠올렸다.


얼마 전부터 M이 덜 웃기 시작했다.

서류를 지원하다 딱 걸려서 대학원 말고 취업을 하겠다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M은 "대충은 알고 있었는데, 먼저 말 안하길래 안 물어봤어"라고 별일 아닌듯이 말했다.

한결 마음이 놓였던 나는 그 후로 M에게 취준과 관련된 이런저런 생각들을 툭툭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다 유럽 석사 넣어뒀던 것이 붙어서 인스타에 짧게 올렸고, 그 후로 M은 조금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이번 학기가 바빠서 그런건가, 생각하고 철없게 재잘거렸다.


그러다 M이 살짝 짜증을 냈고 나는 또 '피곤해서 그런가보다'하고 넘겼다.

그런데 다음날 M이 산책을 하다 갑자기 눈물을 흘렸고, 나는 처음 보는 그의 눈물에 당황했다.

그도 그런 자신의 모습에 당황했는지 "어 왜 이러지, 나 원래 안 이러는데" 말하면서도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조금 지친 것 같아. 돌아보니까 많이 힘들었더라고."


그럴 만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를 만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해외 여행을 오래 가버렸고, 돌아와서도 서울에 몇 개월 있다가, 잠깐 학교로 돌아오는 듯 했다가, 다시 떠나간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내게 한번도 가지 말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여행을 떠날 때면 좋은 거 많이 보고 좋은 기억들 가득 담아 오라고 말해주고, 크고작은 스트레스와 끝이 보이지 않는 진로 고민의 늪에서 토해낸 어두운 감정들을 맑은 마음으로 씻겨주고, 갑자기 취준생이 되었을 때도 응원해주고 세심히 보살펴줬다.


그동안 그는 오랜 기다림과 연이어 꺾이는 희망으로 조금씩 말라가고 있었다.


"고장나버린 것 같아."

벤치에 축 늘어진 채 힘이 빠진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부서질 때까지 나를 좋아한거야?"


"어쩌면."





영화에서 공룡이 앞만 보며 달려가다가, 닫힌 문 앞에서 뒤를 돌아보며 얼마나 많은 실이 풀렸는지 깨닫는 장면은 그래서 더 슬펐다.

그의 모습과 겹쳐보여서.



섧게 우는 그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너 옆에 있어줄 수 있는 안정적인 사람을 만나면 더 좋을 것 같다'라는 죄책감을 고백할까, '나는 너를 좋아해서 놓아주고 싶지 않다'라는 이기적인 속내를 말할까.

그 순간 무엇이 그에게 더 감당하기 힘들었을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난 후에 더 좋았을 선택도 무엇인지 모르겠다.


"나는 참 비겁한 사람이라 이 관계를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았는데, 너는 방법을 찾고 싶게 만들어."


어느새 내가 울고 있었고 그는 울지 말라며, 내가 울면 자기가 슬프다고 하며 안아줬다.


많이 무서웠냐고 묻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눈물을 흘린다.


"근데 또 이렇게 얼굴 보면 응원해주고 싶어."


응원해주고 싶으면서도 내가 가는 것을 선뜻 기뻐해주지 못하는 스스로가 싫어지기도 했다고.


이렇게 고운 사람이 서러운 울음을 터뜨릴 때까지 아프게 한 내 지난 모습들이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그렇게 한참을 껴안고 낮은 숨을 내쉬며 눈물을 흘렸던 밤이 있었고, 여전히 그는 나와 함께 밤산책을 한다.

나는 수없이 침잠했고, 그는 그럴 때마다 자신의 실을 풀어 내어주었다.

지겹도록 길을 잃을 때마다 그는 나의 조각을 소중히 모아 다시 가져다 주었다.

불확실한 미래와 다시 장거리라는 먹구름이 있긴 하지만, 이제는 내가 바뀔 차례다.

그가 슬퍼지게 하고 싶지 않고, 우리라는 이름으로 걸어가고 싶으니까.

Lost and Found.




영화: https://youtu.be/35i4zTky9pI?si=PO8QW7tvWuaAOVtV





영화 리뷰: https://youtu.be/L528AZJDm7s?si=_uXrS8UiYlJ3u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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