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의 흐린 날
나는 물속에 있는 게 좋다. 물속에 있으면 자유롭게 유영하는 고래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네 가지 영법 중에서는 배영을 가장 좋아한다. 하늘을 보며 둥실둥실 물 위에 누워있으면 편안해서. 그러나 수영장이든 바다에서든 배영을 하면 물을 먹기 딱 좋다. 평화롭게 가다가도 옆 레인 사람이 세찬 물보라를 일으키며 접영을 하거나, 파도가 밀려오기라도 하면 평화로운 호흡은 깨진다. 물을 먹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다 보면 어느새 물 위에서 허우적거리는 나를 발견한다.
여기에 오기 전 여름, 7살 때 1년 간 수영을 배운 이후로 한 번도 수영을 하지 않았던 나는 패기롭게 한강크로스스위밍챌린지라는 목표를 세우고 퇴근 후에 늘 수영 연습을 했다. 원래 대회일은 폭우로 연기되고, 연기된 대회일은 태풍 예보로 흐지부지되어 버렸지만. 대회를 신청하고 나서야 한강물이 그렇게 더럽다는 것을 알고 매일 출퇴근을 할 때마다 "내가 저기 뛰어들어야 한다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심란했고, 심지어 한강에서 수영을 하다 시체에 걸리는 악몽까지 꾸기도 했지만 내게 의미가 큰 도전이 어이없게 무산된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 실제로 대회가 취소된 후 가시적인 목표가 사라져서인지, 더위가 물러나서인지 수영장에 가는 빈도가 눈에 띄게 줄었다.
내가 퍼스에 도착한 지금은 여름이고, 내가 구한 아파트에는 야외 수영장이 딸려있다. 다시 수영을 시작할 때가 온 것이다. 여기는 공공 수영장과 달리 50 가구 남짓한 아파트의 거주자만을 위한 수영장이고 아침 시간에는 사람이 없을 때가 대부분이다. 덕분에 평화롭게 배영을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예상외의 복병이 있었다. 햇빛 때문에 배영을 할 때 하늘을 감상하기는커녕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눈을 간신히 뜰 수밖에 없었다.
여느 때와 같이 집에서 샤워를 하고 수영장에 내려갔는데 뭔가 편안했다. 선글라스를 안 쓰고 있었는데도 눈이 부시지 않았다. 하늘을 보니 퍼스에 도착한 이후로 처음 보는 색이었다. 회색. 퍼스도 흐린 날이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퍼스의 흐린 하늘을 찬찬히 살폈다. 서울의 흐린 하늘에는 짙은 잿빛을 머금은 구름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는데 퍼스의 흐린 하늘에는 얇게 발린 버터처럼 옅은 구름이 연한 잿빛 하늘에 흩어져 있었다.
열두 번 팔을 돌리면 딱 맞는 거리. 흐린 하늘을 편안하게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갔다. 둥실둥실 물 위에 누운 채로 온갖 상상을 했다. 내년에 유럽으로 교환학생을 가면 터키에서 열리는 보스포루스 콘티넨탈 크로스 챌린지에 참가할까, 그러려면 내가 잘 못하는 자유형을 연습해야겠지, 그거 신청이 언제더라... 두서없는 생각이 이어졌지만 자연스레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날씨에 예민해서 흐린 날이면 기분도 항상 우중충해졌는데 흐린 날을 좋아할 이유를 하나 찾았다.
흐린 날은 배영 하기 좋은 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