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 노트 34
25.11.25
1.
15년도 봄의 끝자락이었다. 우연으로 손에 들어와 읽은 나카이 히사오 선생의 [분열병과 인류-정신병은 어떻게 만들어졌나]는 내게 가슴 뛰는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었다. 그 책은 1장부터 '분열친화자' 요인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었고, 그 구절은 아직도 생생하다.
선취적 구상
네덜란드의 임상정신의학자 륌케Henricus Cornelius Rumke, 1893~1967는 정상인들도 모두 이른바 분열 증상을 체험하지만 그건 몇 초에서 몇십초라고 했다. 이 지속 시간의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고 그는 자문한다.
...
나는 한편으로 분열병을 앓게 될 가능성은 전 인류가 다 갖고 있다고 가정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심각한 실조(失調[의학] ‘조화운동못함증’ 즉, 운동실조증, 알퐁스 도데가 겪은 매독의 증상과도 일치한 의미의 실조인 듯 싶다) 형태가 다른 병보다도 분열병으로 발전하기 쉬운 ‘분열병 친화자’(이하 ‘S친화자’로 부르겠다)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벼운 실조 상태라면 가벼운 우울증을 비롯해 심기증(心氣症hypochondriasis. 기질적인 신체 질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체 상태에 대해 실제 이상으로 과도하게 비관적으로 고민하고 걱정하며, 그 결과 신체와 정신 및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하는 정신 질환의 하나. 건강염려증)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분열병 친화성을 기무라 빈이 인간학적으로 “ante festum(축제 전야제=선취)적인 구조의 탁월성”이라고 포괄적으로 파악한 것은 내 입장에서 보더라도 설득력이 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예전에 ‘징후 공간 우위성’과 ‘통합 지향성’을 추출해 “가장 멀고 가장 희미한 징후를 가장 강렬하게 감지해 마치 그 사태가 현전한 것처럼 두려워하고 동경한다”라고 얘기했다. (징후가 국소적으로 한정되지 않고 하나의 전체적인 사태를 대표상하는 것이 ‘통합 지향성’이다.)
'가장 멀고 가장 희미한 징후를 가장 강렬하게 감지해 마치 그 상태가 현전한 것처럼 두려워하고 동경한다'. 이는 나의 삶 전반에 걸쳐 늘 느껴왔던 나의 이질적인 상태 - 즉 남들에게서는 잘 관찰되지 않는데 왜 난 이럴까 하는 - 부분을 아주 속 시원하게 긁어주는 문장으로 다가왔다. 가장 멀고 희미한 징후. 그건 내게 있어서 매우 매혹적인, 또는 날 부르는 듯한 손짓이 느껴지는 어떤 균열이었다. 그 틈새는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도 벌어지지도, 넓혀지지도 않는 틈새였지만, 아니 그래서일까, 그 적당한 거리가 유지되기 때문에 마치 날 부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징후는 내 삶에 몹시 지배적이었다.
이는 유년 시절 산에서 뛰놀던 체험을 가장 '살아있던 순간'으로 기억해 있는 것과 혼합된다. 나카이 선생은 이를 수렵채집민의 정신에 있어 매우 중요하고 특화된 것이라는 해석을 하는데, 과연 타당하고 또 그와 유사한 행위들과도 통합을 이끌어냈다. 특히 오늘날 이러한 친화자들이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아 유전 형질을 후세에 남길 수 있는 건 왜일까에 대한 꽤나 흥미로운 가설도 마찬가지다. 분열친화자들의 징후 민감도는 타인의 미묘한 표정, 몸짓, 사소한 변화 등 언어-비언어의 작은 차이에 대해 재빨리 감지할 수 있기에 파트너와 관계를 맺는 데 보다 뛰어난 기지를 발휘할 수 있다고 말이다. 쉽게 말하면 연애를 잘하는 능력이다. 다만 이건 단순히 말할 수 없는 것이 1:1 관계에 있어 그 상대가 어떤 정신이냐에 따라 그 징후 민감도는 장단의 극단을 달리 나타낼 수밖에 없다. 잘 먹히면 배려와 세심함 그리고 사랑의 표현이 되고, 그에 잘 먹히지 않으면 상대의 인식에 피로와 부담을 주는, 그래서 되려 본인이 잠재적 가해자가 될 수 있는 그런 악마적 성격을 갖고 있다. 남들은 잘 느끼지 못하는 걸 혼자 감각하고 인식하는 건 당연히 이런 위험을 짊어진다.
여튼 난 어떤 책에서도 이러한 특질을 이런 방식으로 풀어내는 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매우 흥미롭고 또 더욱 알고 싶어졌었다. 나카이 히사오 선생의 책 중 국내에 번역되어 있는 [천재의 정신병리]도 구해 읽었고, 이를 통해 '병적학'에 단편을 맛볼 수 있었다. 그렇게 떨어진 돌 무더기에서 금의 편린을 발견한 나머지 근처에 분명 금맥이 있을 거란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것처럼, 나카이 히사오 선생을 필두로 관련 자료를 마구 찾기 시작했다.
먼저 저 책에서 잠깐 나오는 '기무라 빈' 선생의 개념인 '페스튬'이 너무나 궁금했다. 내가 일본어를 할 수 없다는 게 무척 서운하게 다가왔고, 그 흔적을 열심히 찾았지만 도저히 제대로 된 자료를 접할 수 없었다. 한국어로 가닿을 수 있는 기무라 빈 선생의 시간-존재 구조 개념은 아감벤의 책에 잠깐 나오는 수준이거나 한 칼럼에서 잠깐 등장하는 수준이 전부였다. 그 후 일본 사이트에서 검색을 통해 '야스나가 히로시' 선생을 알게 된다. 그렇게 매년 틈이 날 때마다 리서치를 진행한 결과 약 8년에 걸쳐 대략의 지형도만을 얻을 수 있었다.
2.
일본 정신의학 2세대 중 3명인 기무라 빈, 나카이 히사오, 야스나가 히로시는 각각의 독자적인 정신병에 대한 입장을 갖고 있다. 여기서 독자적이라고 함은, 이 세 분이 각각 '스스로의 납득이 아니면 안 된다'는 아주 훌륭한 태도로 의사라는 역할, 탐구자로서의 역할, 학자로서의 역할에 임했다는 뜻이다. 기무라 빈 선생은 독일 유학 생활을 통해 후설-하이데거의 철학을 접했고, 또 그 영향으로 나타난 '인간학적 정신의학'에 확고한 태도를 갖고서 일본으로 돌아와 번역과 저술 활동에 지대한 공을 남겼다. 나카이 히사오 선생은 일본 학자의 책을 읽다보면 간간이 나타나는 '웅장한 산'이다. 난 그런 인상을 받고 있다. 야스나가 히로시 선생은 전적으로 나카이 히사오 선생의 책에서 나타난 한 도해를 보고 알게 된 미지의 인물이었다. 간단한 검색으로 접하는 '팬텀 공간론'은 뭐가 뭔 소리인지 참 알쏭달쏭하면서도 직접적으로 와닿지는 않았었다.
내게 있어 일본 정신의학에 대한 관심은 먼저 기무라 빈 선생의 페스튬 개념이었다. 그와 더불어 나카이 선생이 '미분인지 회로-적분인지 회로'에 대한 글이 뒤따라왔고, 추가로 야스나가 선생의 '팬텀 공간론'이 있었다. 검색을 통해 이러한 개념이 어떤 책에 있는지 알아보는 건 쉬운 일이었다. 일본어를 할 수 없어 읽지 못하는 게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중간에 일본어 공부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역시 읽을 수준에 완전히 도달했던 건 아닌 매우 기초적인 수준에서야 멈추게 되었다. 그렇게 잔잔하게 이어지던 이 갈망이 번역 서비스가 발달하면서 확 터져나오게 되었고, 작년 말에서야 비로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작년 말에는 야스나가 선생의 개념을 배우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더불어 기무라 빈 선생의 책도 읽긴 했지만 몇 권을 남겨 두고 있었다. 이번에 그 남은 책들을 마저 읽고, 마침내 이들의 개념들을 정리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했다. 체화에는 앞으로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내게는 인간에 대한 훌륭한 선생님들이었다. 비록 한국인이라는 이방인이 제멋대로 읽은 것일 뿐이지만, 국내에서는 그 어떠한 연구 자료도 발견할 수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내게 더욱 소중한 시간이었다. 나의 갈망이 없었다면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인물에 대한 배경과 사상적 흐름을 전반적으로 개괄하고 또 정리하는 건 굳이 내가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난 그저 한 개인의 독자로서, 21세기 도시 시민으로서 가벼운 소회를 남길 생각이다. 내게 이들의 글은 사실 우리네 일상과 동떨어진 소위 '정신병' 현장의 실제 임상에서 활동하는 정신의들의 값진 목소리에 다름 아니다. 무엇보다 '의사'라는 직업에 있어 그 정신적 가치관의 일치와 더불어 삶이 녹아든 사람의 '생각과 글'이라고 하는 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안에서 내가 보석처럼 반짝이고 또 값진 것으로 느끼는 건 바로 '인간 정신에 대한' 태도다. 내가 철학과 문학에 깊이 빠질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정향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철학과 문학은 더 이상 내게 그러한 깊이를 제공해주지 못했고, 난 결국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듯 '정신병리의 현장'을 찾아간 것이었다. 그곳에서 난 많은 걸 배우고 또 일종의 영점을 잡듯 관점을 바로 잡고 있다. 그에 대한 감사함을 담아, 일본 정신의학자 2세대들 중 3명의 선생들에게 존경심과 더불어 많은 걸 배웠음을 밝혀둔다. 난 그들의 글 속에 지하수처럼 흐르고 있는 '우리 모두의' 라는 그 태도를 아주 생생하게 느낀다. 사람과 사람의 다름을 선 긋지 않을 수 있는 힘은 어디 철학적 개념이나 타인의 경험에서 길어올릴 수도 있지만, 본래 자기 안에 내재하는 힘이다. 이 힘이 없었다면 인류사에 있어 인간은 절대 '같이' 살지 않았을 것이다.
3. 'Festum'적 존재-시간 구조와 팬텀 공간 그리고 징후-예감-색인-여운
나카이 히사오 선생은 2004년 출간한 [징후 기억 외상]이라는 책에서 위와 같은 도해를 1장에 실었다. 이는 야스나가 선생의 팬텀공간론(1960년에 처음 제시된 후 약 27년간에 걸쳐 완성된 조현병의 논리적 정신병리)에 자신의 관점을 종합한 것이며, 동시에 기무라 빈 선생의 Post, Ante, Intra Festum 구조 또한 종합한 도식이다. 기무라 선생과 야스나가 선생의 개념은 각각의 개별 책을 보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
먼저 기무라 빈 선생의 페스튬-축제 구조는 시간의식과 자기의식 간 구조 인식이 불가피하다. 이는 하이데거와 후설발 현상학적 이해가 없으면 제대로 다루기 힘든 개념이다. 그 개념의 종합을 담은 책이 [시간과 자기]로 1982년에 일본에서 출간되었다. 다음은 그 개념의 설명이다.
Post Festum : 축제-잔치(사건 이벤트)가 끝난 뒤, 포스트 페스툼. 돌이킬 수 없는 과거, 사후에 도착함을 가리키는 말. 포스트 페스툼의 시간성은 우울증 환자의 시간성인데, 그는 자신의 ‘나’라는 것을 항상 ‘과거의 나’라는 형태로, 이미 완료되어 돌이킬 수 없는 과거 형태로 경험하며, 그래서 이 과거에 대해 항상 부채의식에 시달린다. 이러한 시간 경험은 하이데거에 있어서는 현존재Dasein의 내던져져 있음에, 즉 현존재[거기에 있음]가 항상 이미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현사실적 상황에 내맡겨져 있다는 기분[처해 있음]에 상응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현존재의 근본에는 일종의 ‘멜랑콜리’가 있는 셈인데, 현존재는 자기 자신에 관해 항상 늦고 항상 이미 자신의 ‘잔치’를 놓치는 것이다. 햄릿.
Ante festum : 축제-잔치에 앞서, 안테 페스툼. 안테 페스툼의 시간성은 분열증 환자의 경험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우울증 환자의 태도가 과거를 향해 있다면 여기서는 그와 정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 분열증 환자에게 있어서 ‘나’라는 것은 결코 확실한 소유물이 아니고, 끊임없이 다시 도달해야만 하는 것이다. 때문에 분열증 환자는 항상 선구anticipation[미리 달려가 봄]라는 형태의 시간을 산다. 기무라 빈 ; 분열증 환자의 ‘나’라는 것은 ‘기존의’ ‘나’가 아니다. 이 ‘나’는 의무에 묶여 있지 않다. 달리 말해, 이 ‘나’는 우울증 환자의 ‘포스트 페스툼’적인 ‘나’, 즉 과거와 부채라는 관점에서만 말해질 수 있는 ‘나’가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 본질적인 쟁점은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일 수 있는 가능성의 문제, 자기 자신이 됨의 확실성의 문제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될 수 있을 위험성의 문제이다. (Kimura Bin, 1992:79)
[존재와 시간]에서 분열증 환자의 시간성에 상응하는 것이 미래의 우위인 바, 이는 기획투사projection와 선구[앞질러 달려가 봄]라는 형태를 취한다. 현존재는 그 시간 경험이 애초에 미래를 기초로 해서 시간화된다는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하이데거에 의해 ‘그 존재함에서 바로 이 존재함 자체가 항상 문제가 되는 존재자’이자 ‘그 존재함에서 항상 이미 자기 자신을 앞질러 달려가 봄[선구함]’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분열증적이고, 항상 자기 자신을 놓칠 위험, 자신의 ‘잔치’에 참석하지 못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Intra festum : 축제-잔치 중 (조증 또는 간질). 혹자는 ‘인트라 페스툼’의 시간적 차원이 돌이킬 수 없는 자아상을 겪는 우울증 환자의 예와 너무 앞서 오는 바람에 자신의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는 분열증 환자의 예 사이에 있는 어느 순간에 대응하리라고, 인간이 마침내 자신의 ‘잔칫날dies festus’을 만나 온전한 자기 현전을 마주하게 될 어떤 순간에 대응하리라고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기무라 빈이 제시하고 있는 두 가지 사례에는 축제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 첫 번째 사례인 강박신경증의 예에서는 현재에의 집착 같은 행동을 강박적으로 반복하는 형태를 취하는데, 이를테면 자신이 정상이라는 증거, 자기가 자아를 잃어버린 것만은 아니라는 증거를 어떻게든 확인하려는 의도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강박신경증 환자는 반복 행위를 통해 그가 명백하게 놓친 잔치에 와 있다는 물질적 증거를 만들려고 애쓴다. ‘인트라 페스툼’의 시간성의 근본적 특징을 이루는 자아상실은 기무라 빈이 들고 있는 두 번째 사례인 간질의 경우 한층 더 분명해지는데, 그는 그것을 광기의 ‘원풍경’, 즉 현전에 대한 일종의 탈자적 초과를 통해 이루어지는 특수한 형태의 자아상실로 제시한다. 기무라 빈에 따르면 간질에 대한 결정적인 물음은 ‘간질 환자가 의식을 잃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이다. 그의 대답은 잔치가 절정에 이른 순간 ‘나’라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 밀착하려고 하는 바로 그 시점에서 고비를 맞은 간질에 의해 의식의 무능력이 더욱 강화되어 의식이 현전을 견뎌내지 못하고 자신의 축제에 참여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이 지점에서 인용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다.
; 몇 초의 순간이죠 다 합쳐도 고작해야 5~6초밖에 안 되지만 그 순간 당신은 갑자기 완전히 성취된 영원한 하모니의 현전을 듣게 됩니다. 그건 지상의 것이 아닙니다. 내 말은 그것이 천상의 것이란 얘기가 아니라 인간이 지상의 모습으로는 견뎌낼 수 없는 어떤 것이란 얘기입니다. 신체적으로 변형되든지 아니면 죽어야 합니다. (악령의 등장인물 키릴로프가 간질에 대해 언급하면서 하는 말)
간단히 보면 포스트-페스튬은 과거, 안테-포스튬은 미래, 인트라-포스튬은 현재로 병렬 배치하기 쉽다. 하지만 이 구조는 [직접성의 병리]에서 기무라 빈 선생이 밝히듯 일종의 깔대기 구조로 그 밑에는 인트라 구조가 '직접적으로' 있고, 그 위로 안테와 포스트가 '간접적으로' 기능한다. 또한 이런 구분은 기무라 빈 선생이 '인간학적'이라는 의도 하에 개진하는 개념으로 후설-하이데거의 영향도 반영되어 '일반 인간 존재 구조'와 같은 위상을 지니고 있다. 즉 그 강도 높은 특질은 각각 우울증-조현병-간질 발작에서 추출된 것이지만, 소위 '정상인의 세계'에서도 이러한 경향성은 분명 나타나 있고, 또 매우 흥미로운 안경을 제공해주는 걸로 받아들이는 게 기무라 빈 선생이다.
이건 나의 개인적 해석이지만, 어떤 유형으로 무언가를 설명하는 특징은 일본의 2세대 정신의학자 3명에게 고루 나타난다. 분명 여기에는 개인의 지적 유희가 발생하는 지점이 관여하고 있을 것이다. 외부 배경의 분위기도 무시할 수는 없다. 정신병리학 쪽에서는 서브로 '병적학'이라는 연구 분야가 있고, 이는 아주 오래전 아리스토텔레스-히포크라테스부터 이어진 '기질론'이 크레펠린의 '성격 유형론'으로, 융도 영향을 받은 바 있고, 또 나카이 히사오 선생도 한때 이쪽 연구에 강한 매력을 느꼈던 적 있는 배경이 있다. 나카이 선생은 '의사란 누구인가'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힌 문구가 있는데, 의사들은 각자 나름의 모델을 추구하는 일견 과학자적 면모를 부분적으로는 갖고 있는 것 같다, 고 말했다. 이는 오늘날 융의 성격유형론에서 파생되어 지금은 다소간 유행이 지나간 것처럼 보이는 MBTI 유형론, 과거에는 일본의 혈액형론 등이 문화를 휩쓸었다. 이러한 것들의 유사성은 관상론이나 손금, 또 사주팔자나 점성술과 같은 역사 깊은 귀납-의식 행위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나카이 선생이 [마녀 사냥]에 대한 글에서 신타그마티즘Syntagmatism이라고 부른 유서 깊은 우리 인간의 정신 구조이다. 즉 이건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개별 모습을 통해 일종의 전체를 그리고, 또 그 전체를 다른 전체의 일부로 여길 수 있는 정신 능력으로, 나의 개인적인 해석이지만 이 능력이야말로 '상징' 능력이다. 속단할 수는 없지만, 사람의 심리나 정신에 관심을 갖고 또 연구를 한다는 그 '행위'를 두고 보면, 역시 인간의 무언가를 '설명하고 싶은 이끌림'이 있는 건 분명하다. 나는 우리 인간에게 이러한 정신적 정향성이 나타나는 걸 보고 지능이 가진 결정적 장점이자 결함 그 자체인 '표상' 능력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즉 표상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으며 그 결핍이 곧 부재와 '없음-무'의 감각을 자아내는 것으로 말이다. 라캉의 정신 세계를 보다 보면 이에 대해 납득하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이 있는 건 아니고, 분명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기도 하다. 정신의 유형을 안다는 것은 곧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반이 되며, 충분히 분화된 개인의 입장에서 자기 동일성의 확장에 기여한다.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 종'에게 있어서는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미덕으로 자리잡는 영역인 셈이다. 나 또한 이 페스튬 개념을 통해 나의 많은 일상을 달리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 다른 이의 정신 구조에 대해서도 조금이나마 단초를 얻음으로써, 오롯한 나의 정신으로 부닥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난 명실공히 안테-페스튬적 성향이 강한 사람이다. 유사 표현으로 '분열기질자'라고 부르며, 나카이 선생도 이쪽이고 야스나가 선생도 이쪽이다. 기무라 빈 선생은 두드러진 인상을 주진 않으나 같은 냄새를 짙게 풍긴다.
안테들은 확실히 추상에 능하다. 빌헬름 보링거의 두 구분인 '공감 충동'과 '추상 충동'은 기무라 빈 선생의 개념 구조로 말해 공감-포스트, 인트라이고 추상-안테다. 한 사람에게 오직 하나의 시간-존재 구조가 있는 건 아니다. 기무라 빈 선생은 그 기저로 파고들지는 않았고, 이는 하나의 아이디어에 머물고 있을 따름이다. 다만 우리가 이러한 시간적-존재적 구조 차이를 구분할 수 있을 때, 한 사람의 정신사적 면모들에 있어 그 근본적 차이가 어디에서 나타나는지를 보다 더듬거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부분-전체라는 복잡한 문제가 나타난다. 통합된 면모에서 부분을 도출할 수는 있지만, 도출된 부분에서 전체로 확장하는 건 조건적 우연성이지 논리적 필연성이 아니다. 워쵸프는 이 방면에서 확실히 뛰어난 철학자다.
언제인가 기회가 되면 각각의 페스튬 구조에 대한 개별 특징이 무엇인지 다룰 수 있으면 좋겠다. 그동안 쉽게 가닿을 수 없던 흥미로운 내용이었기 때문에 체화에 보다 시간을 둘 예정이다. 여하간 나카이 히사오 선생은 기무라 빈 선생의 주요 개념과 야스나가 선생의 팬텀 공간을 부분적으로 종합한 도식을 책에 실었고, 이걸 좀 더 정리하고자 한다.
기본적으로 이 도식은 야스나가 선생의 체험선 위에 나카이 선생이 자신의 개념과 기무라 선생의 개념을 배치한 것이다. 체험선에 대한 건 작년에 다룬 글이 있기도 하고, 오늘은 생략하기로 한다(내 독해가 맞다면 나카이 선생은 야스나가 선생의 팬텀 공간을 오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인트라-페스튬은 자아 방향에 치우쳐진 체험 영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공통감각과 신체감각 측에서 각각 공포와 쾌락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인트라적 사람이 어떤 체험에 더 노출되기 쉬운가로 생각해 볼 수 있으며, 그 예시는 위에 적어둔 도스토예프스키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는 그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대다수의 인물들이 거진 자기 자신과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는 점에서 인트라적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통해 포스트적 인물을 매우 상세하게 묘사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한 작가의 문학 내 인물의 정신 구조를 들여다보려고 한다면 그 특징이 보통은 작가 본인의 정신 구조로부터 크게 벗어나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나카이 선생은 색인-여운의 세계를 프루스트의 소설로 설명한다. 이는 기무라 선생의 포스트-페스튬적 세계이며 신체감각에 기반해 있고, 대상측-베버 페히너적 비례세계로 치우쳐 있다. 내가 보기에 안테의 세계에 적합한 작품을 꼽자면 페소아를 고를 수 있겠다. 페소아는 내게 처음으로 '나와 같은' 느낌을 자아낸, 마치 나의 쌍둥이 형제인가 싶을 정도로 내가 10대부터 일기장에 썼던 글들이 고스란히 적혀 있는 걸 확인하는 경험으로 도착한 작가다. 난 그를 14년도인가 헌책방에서 우연히 손에 잡힌 책으로 만났고, 15년 1월 경 학교 기숙사에서 그의 책을 읽으며 매우 '축제적인' 시간을 보냈던 추억이 있다. 그 후 머지않아 재상품화되면서 조금은 인기 있는 작가로 발돋움했지만, 난 아직도 페소아를 제대로 읽으려면 이 안테-분열기질적 인식이 없이는 불가하다고 생각한다. 과거 바디우가 페소아를 향해 아직 그를 비평할 시대가 아니라고 판단한 데에는 나도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내게는 그저 바디우가 그런 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 것이라는 의혹이 보다 강하며, 안테들의 눈에는 꽤나 '자명한 현실'이다.
난 인트라의 아름다움, 포스트의 아름다움, 안테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느낀다. 안테적 세계는 안테만의 미학이 있다. 위의 도식에서 공통감각 측면으로 징후와 예감이 떠돌아다니는 체험 영역이다. 안테적 세계에서 주요하게 아름다움을 차지하는 코드는 바로 허무와 냉소의 가면을 쓴 비애적인 사랑이다. 매우 건조하고 씁쓸한 코코아 같은, 그러나 쓴맛도 하나의 기호가 될 수 있듯이 다른 이에게는 수상함과 불쾌감을 자아내는 이 세계가 왜인지 매혹적인 냄새를 풍긴다. 마크 피셔가 도출한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의 세계가 바로 안테의 세계다. 추상 충동이 강하게 펼쳐져 무언가를 붙잡는 세계.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에서 라스코의 동굴 벽화에 이르는, 추상이라는 안테들의 능력 없이는 붙잡을 수 없는 세계. 빌렘 플루서 또한 안테의 대표격인 사람이다.
기무라 선생도 명시해두고 있지만, 이러한 존재 구조는 지식-이성 사용과 다른 차원의 것이다. 즉 안테적 성향이 강한 것이 추상에 능하다고 해서 추상 과목으로 여겨지는 순수과학이나 수학 등에 능력을 발휘할 거라는 단순한 생각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분명 시너지는 나겠지만, 결정론적인 건 아니라는 의미다. 특히 야스나가 선생이 묘사하는 이 안테는 매우 정확하고, 또 이러한 성향을 가진 '정상인'들은 한번 곱씹어 볼만하다.
분열기질자가 민감한 반면 둔감하다고 속되게 말해지는 모순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모순이 아니게 된다. 즉, 그는 표상 능력이 크다. 큰 낙차 d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현실적으로 아직 작은 P를 예컨대 확대경으로 확대하여 Q인 양 볼 수 있다는 것과 같다. 따라서 그는 ‘생리·현실적으로(a’)는 작은 P’를 ‘주관적으로(a)에는 큰 Q’로서 두려워하는 것이 되며, 바로 이 의미에서 ‘민감’한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는 이것이 표상 d의 낙차에 의해 생기고 있는 것이며, 즉 아직 진정으로(육체적으로) 인용권을 넘어서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그 증거로 그는 ‘조롱’에 대해 즉각 말대꾸하거나 달려들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통상 그가 행동에 신중하기 때문이기도 하나, 이 행동의 신중함 자체가 표상 능력, 즉 행동에 수반하는 위험의 예측력이 높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는 대체로 모르는 척을 하고, 그 조롱을 가치적으로 무시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에 성공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는 역시 멀리하는 데 능숙하다는 것이 된다. 자신이 좋아서가 아닌 한, 그는 강한 자극이 (<-a’를 강요받는 것을) 침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그것이 가능하다. 즉 u로서는 언제나 멀리 유지되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 있어 평소 가장 하기 쉬운 거리, u-opt인 것이다.
이 유형의 기질자에게 있어, 표상 능력이 지니는 큰 의미는 거의 사활을 좌우하는 태도의 것이라는 점은, 이번의 파악이 더욱 잘 보여준다. 표상 능력에 더해 충분한 방어 도식 능력을 갖추게 되면, 이 유형의 기질자는 극히 안전하게(위험 회피적으로) 세계를 유지할 수 있다. P(a’)를 작게 억제할 수 있으므로, 아무리 ‘선취’하더라도 그것은 그다지 육박적 공포가 되지 않는다. 반면, 안전하다고 보면 크게 접근 ―― 강하게 즐기는 것도 가능한 폭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본래의 이 기질이, 어떤 사정으로 표상 능력 일반을 손상하거나, 혹은 어떤 종류의 방어 도식 미성숙 영역에서 위험에 노출되게 되면 비참한 일이 된다. 그 경우는 표상이라 하더라도 a’가 현저히 높아져, 즉 깊이 팬텀 안으로 침입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방어·표상 도식 이외에는 자연히 주어지거나 체득된 방어력, 무의식적 터프함을 갖고 있지 않은 일이 많다. 기껏해야 자폐의 껍질 속에 틀어박히는 것이 먼저 하기 쉬운 반응이며, 더 나아가 팬텀 기능 자체가 과로에 빠져 파탄하면 ―― 그것이야말로 분열병형의 증상이 발현하는 것이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충분히 논했으며, 본고는 정상 범위의 성격학을 논하는 것이 주목적이므로, 분열병에는 들어가지 않기로 하겠다. 다만 이 기질권의 변연에서, 같은 기본구조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운용의 유동성이 현저히 경화한 형태가 소위 schizoid라는 형태가 되는 범위에 그쳐 두겠다.
어찌 되었든 이 기질권은, 그 큰 d 능력 때문에, 즉자적 세계로부터의 거리를 멀리 둘 수 있다. 아니, 멀리 두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다. 추상은 그의 자연스러운 경향이다. 일반의 살아 있는 인간은, 저마다 주체성을 지니고 있는 만큼(그리고 그것이 또 알아지는 만큼) 예측하기 어려운 존재이며, 그에게 있어 소중하지 않은 동료는 아니지만, 응대에 피로를 안기는 존재이다. 따라서 그로서는 보다 안전하고, 적어도 적극적 가해의지가 없으며, 법칙만 파악하면 예측하기 쉬운 자연, 물질에 대한 친화성을 갖는다. “물질을 상대로 해서 무엇이 재미있는가”라고 다른 기질이라면 생각할 법하나, 그는 표상 능력에 의해 인간적인 것을 마음껏 자연과 물질에 투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기질권의 예술가에 비하면, 여전히 어딘가 메마른 거리가 있거나, 혹은 탈현실적일 만큼 낭만적인 경향을 띠게 되리라. 총괄해 말하면, 이 기질권의 u-opt와 d-opt의 양상은 통상적 의미의 인간 사회 레벨에는 잘 맞지 않는다. 더 그 너머로 돌파한 추상의 세계, 비유하자면 공기조차 없는 우주 공간에서 노니는 풍(風)이 있다. (그렇다고 개별 경우의 인간 통찰이 예리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부분적으로 지나치게 날카로워 왜곡으로 기울고, 균형을 잃기 쉬운 위험이 있다.)
아마 처음 접하면 이해에 무리가 갈 것이다. 야스나가 선생의 이론인 팬텀 공간은 시간을 충분히 들여야 좀 이해가 갈 정도로 일상생활에서 돌아다니는 통념과 친화적이진 않다. 핵심을 말하면, 안테적 사람들의 정신 구조에는 자신의 질적 에너지와 외부 대상을 인지할 때 그 중간에서 탄성 매질로 작동하는 '팬텀 공간'의 a'계 간 에너지 낙차가 매우 큰 인지 구조가 있다. 이 낙차는 쉽게 말해 나카이 선생의 묘사인 '가장 희미하고 가장 멀리 있는 징후'를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구조다. 인간관계에서 있어서 안테들은 대체로 내향적 성향을 띄기가 쉬운데, 나의 작은 아버지가 살아 생전 나의 아빠에게 쓴 편지에 담긴 한 표현, '비열한 인간 새끼들 사이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 가능해지는 성향이다. 마음이 다치기 매우 쉽다. 또 그의 노력은 강직하고 우직하게 나아갈 힘이 있으나 유지되기란 매우 위태롭고, 특정 조건이 부가되는 데 바로 '안전함'이다. 이는 팬텀 공간의 '거리감'과 같고, 즉 강도다. 뉴턴이 안테 쪽 사람인데, 뉴턴이 물리학의 영역에서 뭔가 하기 위해서는 그를 믿어주는 든든한 조력자가 있을 경우에 한해서였다고 한다. 뉴턴은 늘 자신의 연구 논문을 누가 베끼거나 하는 망상에 쉬이 노출되었고, 또 실제로 논문을 발표할 당시 한 인물이 뉴턴을 가열차게 비판하자 뉴턴은 그대로 꺾여 상아탑에 틀어 박혀 전혀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의 일생에 있어 거진 대부분의 시간은 점성술과 이교도에 심취한 이력이 있다는 건 꽤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나카이 선생은 [천재의 정신병리]에서 이를 다루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뉴턴을 천재의 인물로 매우 인정하고 칭송하지만, 실제 그의 사적 삶에서 느꼈을 두려움은 아마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카이 선생은 '메타-'라는 개념으로 일상 세계와 내면 세계를 연결하는 어떤 위상을 따로 지시했는데, 이 세계는 기무라 선생이 말년까지 곱씹었던 '아이다(사이)' 개념의 거처이기도 하다. 이 위상은 야스나가 선생의 팬텀 공간으로 볼 수 있다고, 난 해석한다. 내가 보기에 이 위상은 마치 보이지 않는 우리의 중간 지대로서, 이 지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사실 몰라야 하는 게 맞다. 나카이 선생의 생물학적 지식에 도움을 받아 우리의 진화적 계통발생에 있어 후각적인 영역은 꽤 유서 깊은 생명체의 기능 중 하나인 바(나카이 선생은 '사유'가 후각적이라고 가정해는데, 난 이에 매우 탁월한 통찰이라고 동의한다), 나카이 선생이 말하듯 이 뇌의 부위는 무리하게 쓸 수 있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써 문제가 쉽게 발생하는 부위로 가정한다. 이는 워쵸프의 철학에서도 읽어낼 수 있는 가설이다. 우리 생명체가 어떤 센스를 갖고서 그걸 지능으로 결합했을 때 그 사용 범주는 이미 신체를 벗어나 징후 우위의 공간으로 무한한 감각을 처리해야만 하게 된다. 이 세계는 확실히 '이성-합리'의 인간 능력으로 판단하기 쉬운 세계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마냥 좋다고 할 수는 없는, 그래서 조현병처럼 문제가 발생하고 나서야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매우 근본적인 지평이다.
이 공간에 대한 인식을 위의 3명이 각기 다른 접근으로 다가가는 것도 매우 재미있다. 기무라 선생은 후설-하이데거에서 출발한 철학 개념으로 다가갔고, 야스나가 선생은 한때 '수학자'를 꿈꿨던 흥미가 연결되어 '기하학'으로 표현됐고, 나카이 선생은 베버 페히너 법칙으로 유명한 '비례 세계'로 표현했다. 다르게 보이지만 사실 입구가 다른 같은 공간임은 분명하다. 어떤 문도 자신에게 맞지 않을 수 있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고, 이는 결국 리처드 로티가 말한 '재서술'이라는 언어 표현의 문제일 뿐, 충분히 '표준'이 될 수 있는 지평이다. 하지만 난 이 지평이 앞서 말했듯 '몰라야 하는 공간'이라고 일단은 생각하는데, 우리 인간이 지금 이 상태까지 진화발달한 맥락에서 분명 들춰지지 말아야 할 일종의 정신적 판도라 상자가 아닐까 하는 의혹을 품고 있다. 그만큼 너무나 중요하지만 만약 왜곡되거나 자칫 어긋나기라도 한다면 정말이지 막대한 결과가 야기된다는 걸 야스나가 선생의 조현병론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우리 인간이 현 수준에서 다룰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사회화된 인간으로서 더욱더 그렇다.
이 경고를 보다 통념의 언어로 표현하면, 블랑켄부르크의 표현이 도움된다.
블랑켄부르크는 "자연스러운 자명성(natürliche Selbstverständlichkeit)"과 "자아의 자립성(Selbständigkeit des Selbst)"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von selbst sein)과 "스스로 존재하는 것"(selbst sein)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자립적인 인간의 자기 결정은 자연스럽게(혼자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나 자연스럽게(혼자 저절로) 당연하게 여겨지는 모든 것, 즉 말하자면 무명(無名)의 대양에서 돌출된 것이며, 동시에 그와의 연결을 결코 잃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본질적인 필연성으로 보면, "스스로"가 "자연스럽게"로 교대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지만, 인간의 자립성과, 그로부터 태어나 성장하는 모든 자기 이해가 수많은 새로운 자명성의 기초를 만드는 한에서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 자립성은 자명성에 의존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헤겔이 말하는 ‘부정하고, 보존하며, 고양하는’ 삼중의 의미로) 지양한다. 다른 한편 자연스러운 자명성은 그것이 배후에 물러나 있을 때 자립성의 기초를 형성한다.》
자명함. 이 표현은 매우 가볍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우리 인간이 인식을 하기 위해 가장 근본이 되는 감각이다. 과거 철학자들은 이를 '절대성'이라고 혹은 '보편성'이라고 부를 만큼 매우 원초적인 능력으로 지각한 바 있다. 이 능력이 블라인드 쳐져 보이지 않는 게 한 측면에서는 매우 당연하고 또 올바른 일일 것이다. 이 자명성이 상실된 상태를 블랑켄부르크는 조현병 환우들의 증상으로 봤다. 특히 '진짜-가짜'의 근본적 감각을 좌우하는 이 '자명성'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의존하고 있는 제2의 심장이나 다름없다. 우리 신체에는 신체 나름의 필수가 있듯이 우리 정신에는 정신 나름의 필수가 있다고 말하면 사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겠지만, 분명 21세기 도시 사회는 정신 기능과 능력을 무한히 뻗을 수 있게 24/7로 구획하고 또 향정신성 약물로 '당장의 하루'를 '생산성'으로 환원하며, 무엇보다 '돈을 벌기 위해' 필수적인 '수단'으로 여기고 있지 않은가. 의식과 이성-합리의 과잉 시대에서는 당연히 민주주의 사회와도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보니 더욱 소홀히 하기 쉬운 부분이다. 나카이 선생의 지적을 마지막으로 남기며, 9년 동안의 갈증을 해소한 소회를 이만 마친다. 내게 있어 정신병의 현장은 우리 모두의 현장이며, 그 안에는 고통받는 자, 사랑하는 자, 죽는 자, 죽이는 자, 두려워하는 자, 만끽하는 자 등 인간적 면모 이전의 생명적 면모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현장이다. 난 오늘날 유행하는 인간중심주의의 비판이 소위 '비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논의되고 있을 때, 15년도부터 그 중심은 우리 인간의 정신병 현장에 있을 거란 직관을 느끼고 있었다. 워쵸프의 철학으로부터 배운 점을 활용한다면, 통합의 과제가 남았다. 소위 정상인에게 있어 비인간은 사실 우리 모두의 안에 내재된 성질이고, 그 성질을 보다 날것으로 볼 수 있는 현장이 바로 정신병리의 현장이다. 즉 21세기 도시 인간의 안에는 '비인간'이 있다. 난 이 '비인간'의 형상을, 이성의 그림자이자 생명의 위기로 보고 있으며, 소위 다른 대상에게 투사하고 이입해 그런 비인간을 호명하고 호출할 게 아니라 우리 안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워쵸프의 철학에서 내가 해석하는 내용이다. 우리 인간이 이성을 사용하면서 팬텀공간에는 비-인간을 필요로 했다고. 소위 3대 정신병이라 불리는(지금도 그럴까?) 증상이 사실은 면역 반응은 아닐까 하는 나카이 선생의 직관에 난 동의한다. 난 이를 슬로터다이크를 통해 배웠다.
사고란 이런 것이다. 미로란 한 번 들어가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것이 미로의 정의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하지만 확률적으로는 드물긴 하지만, 미로에 들어가 장애물에 부딪히지 않고 쉽게 빠져나오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사고이다. 미로란 곧 안전장치다. 특히 적분 회로적 인지 시스템은 그 역할을 한다. 원자로와 마찬가지로, 중추 신경계는 매우 위험한 물건이기 때문에, 원자로처럼 백분의 일 정도의 안전률을 적용하여 운용되고 있는 것이다. 체르노빌에서는 폭주 직전에 400배의 출력이 나왔다고 한다.
본론에서 약간 벗어나지만, 조현병이 잘 낫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 병이 생명과는 관계없다는 점에서 중추 신경계 내에서의 파급 범위는 제한적이다. 조현병으로 사람이 죽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생명과 관련된 뇌간이나 그 이하의 연수 등으로 내려가지 않은 시스템의 불안정이기 때문이다.
뇌가 가까운 친족인 유인원과 비교하여 두 배로 커졌다고 해서 기뻐하는 것은 어리석다. 아마도 뇌에 맞지 않는 일을 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무리가 따르고, 이는 마치 서투른 설계자가 크기만 키워버린 것과 같은 상황일 가능성도 있다. 물론 가설이지만, 왜 이런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이러면 초창기 컴퓨터가 더 좋은 컴퓨터였다는 말과 같은 소리다. 인간 중심주의는 뼛속까지 뿌리박힌 사고 방식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