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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Sep 14. 2020

#50. 지구 반대편의 가을

자가격리 13일 차의 기록

코로나 검사를 다시 받았다. 체온이 계속 높아서다. 도착 사흘 후부터 체온이 줄곧 37도에 머무르고 있다. 기침도, 오한도, 가슴 통증도 없는데 체온만 높다. 오늘 아침에도 37.5도였다. 지난주 목요일, 불안한 마음에 보건소에 재검사를 요청하니, 차량을 보내준다고 했다. 자가 격리 이후 처음으로 하는 외출이었다. 다행히 결과는 다시 음성. 처음에는 코로나를 걱정했는데, 이제는 그냥 걱정이 된다. 몸 어딘가에 염증이 생겼다는 신호 같아서. 격리가 끝나면, 병원 투어를 돌 작정이다. 가장 의심이 되는 내과와 비뇨기과와 부인과를 차례로 돌고 나면, 어디가 문제인지 알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냥 컨디션이 나쁜 것인지도 모르겠다. 격리 기간 동안 생활이 완전히 무너졌으니까. 일상의 대부분을 늘어져 있었으며, 아무 때나 먹고, 제대로 자지 못했다.


내일이면 격리 해제다. 그동안 무엇을 했냐, 하면 정말로 한 게 없다. 저녁 아홉 시부터 새벽 세 시까지 수업을 들은 것 이외에는 떠오르는 게 없다. 멍하게 누워 팟캐스트를 듣다가 (비혼세를 정주행 했다. 눈물의 차녀 시리즈를 들으며 광광 울었다.) 가끔 히죽거렸고, 친구가 보내 준 과자를 먹으며 영화를 봤고, 결제해놓고 보지 않았던 전자 소설을 읽었다. 집안의 고요를 견딜 수 없어서 (자꾸만 현타가 왔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생활 소음을 틀어 놓아야 했다. 아이패드로 유튜브를 틀고, 랜덤으로 재생이 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래도 이 작은 집에서 사부작 거리며 꽤 돌아다녔다. 때가 되면 씻고, 빨래를 하고, 바닥을 닦고, 식탁을 차리고, 치우는 일은 여전히 반복되어서,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사는 건 참 분잡스럽구나, 생각했다.


일기를 많이 썼다. 삶이 멈춰 있으니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두고 온 것들을 계속 그리워하다가,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는 사실에 슬프다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희망과 불안을 반복했다. 이렇게 내내 지나간 시간만 더듬다가는, 마음이 영영 과거에 박제될 것 같아 두려웠다. 정신을 차리자, 책상 앞에 앉으면 해야 할 리스트가 점점 불어났다. 운동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생각만 해오던 채식을 하고, 병원에 가고, 머리도 자르고, 영어 시험도 보고, 불어 시험도 보고, 미뤄 온 편지도 보내고, 서점에 가고, 산책을 하고, 엄마와 장도 봐야지. 자장면도 먹고, 친구를 만나서 편의점 테이블에서 맥주도 마셔야지. 코로나 때문에 바깥 활동은 제한될 테지만, 마음만큼은 이제 앞을 보고 걷고 싶다. 두리번거리지 않고.


어제는 <러브, 로지>라는 로맨스 영화를 봤다. 댓글에 누군가가 썼던 것처럼 "타이밍이 오지게 안 맞는" 사랑 이야기였다. 어릴 때부터 단짝이었던 알렉스와 로지는 열여덟 살 때부터 좋아하는 마음이 같았지만, 오해로 인해 연인이 될 기회를 여러 번 놓친다. 그렇게 서로 둠칫 거리는 동안, 각자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동거도 하고 이혼도 하고 (12년 동안 이렇게 많은 일이 있을 수 있다니) 결국 서른이 되어서야 사랑을 확인한다. 이렇게나 어긋나는데도 끝내 만나다니 역시 영화로군, 싶다가도, 알렉스의 결혼식장에서 “네가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언제나, 마음을 다해, 진실로, 완전하게 너를 사랑한다”라고 한 로지의 고백을 듣고, 그 마음이 무엇일까 생각하다 조금 울었다. 나는 자주 물리적인 거리나 타이밍을 원망하곤 했는데, 지금 보니 그냥 마음이 모자란 게 아니었나 싶다. 포기하지 않는 마음과 용기가 있다면, 두 사람은 결국 만날 것이다.


소설은 리디북스에서 오래전에 결제만 해놓았던 김금희 작가의 <오직 한 사람의 차지>를 읽었다. 소설집에 실린 모든 작품들이 각기 다른 이유로 좋았지만, 무엇보다 모든 인물이 특별해서 좋았다. <경애의 마음>의 공상수와 경애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마음에 남아서, 오래오래 (지금까지도) 그들의 행복과 안녕을 바랐던 것처럼.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감정의 파장을 읽는 게 재미있었다. 그것은 위로이기도 하고, 공감이기도 하고, 원망이기도 하고, 슬픔이기도 하고, 어떤 상실이기도 했다. '레이디'라는 작품이 좋아서 두 번 읽었다. 맑고 여린, 그래서 더 다치기 쉬웠던 열여섯 정아와 유나의 우정과 사랑 이야기였다. 한 여름밤 바닷가 텐트 속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으로 가까워지기 위해 애썼던" 두 사람의 몸짓이, "파도가 끊이지 않듯 최선을 다해 노력할 뿐"이었던 두 사람의 마음이 아름다웠다. 이부자리에서 책을 덮고 눈을 감았는데, 감은 눈 위로 "그 여름의 바캉스"가 "무수한 순간, 무수한 장면으로 변주되었다."


열어 놓은 창으로 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아침부터 쨍하던 햇살이 서서히 누그러지는 것을 보니, 진짜 가을이 왔구나 싶다. 한국의 가을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휴가 때 들렀던 한국은 늘 극과 극이었으니까. 절절 끓는 한여름이거나 매서운 한겨울이거나. 주어진 시간이 짧아 그나마도 숨 돌릴 틈이 없었다. 엄마는 아침부터 전화를 걸어 격리 해제된 후, 무엇이 하고 싶은지 묻는다. 나는 어디 출소라도 하냐며 웃었는데, 출소자만큼 내일이 기다려지는 건 사실이다. 지구 반대편으로 돌아와 맞는 첫가을이 나를 기다린다. 조금씩 깊어가는 계절의 속도에 걸음을 맞추고 앞을 향해 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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