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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Aug 05. 2018

#10. 집에 가기 싫은 날

가짜 온기라도 그리워지는 밤이 있다

가끔 나는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나고도 오랫동안 회사에 남는다. 끝내지 못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회사에 드리워진 내 그림자가 너무 무거워 떠나기 힘든 그런 날이 있다. 텁텁한 공기도, 커다란 컬러 프린터의 열기도, 파쇄기의 소음도, 하루 종일 쬔 전자파도, 칸막이가 없어 사생활이라곤 없는 이 책상도 너무나 지긋지긋한데,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그런 날. 그럴 때면 빠진 이처럼 군데군데 비어있는 책상들 사이를 어슬렁대다가 야근하는 동료의 책상 칸막이 너머로 고개를 들이민다. 나누지 못한 그간의 안녕을 묻고, 회사일로 두런거리다가, 연애나 여행, 종교 같은 (동료로서 허용되는) 적당히 가벼운 사생활을 나누고 나면 사무실 창밖으로 서서히 어둠이 내린다. 그제야 나는 무거운 그림자를 질질 끌며 집으로 향한다.


집으로 바로 가는 법은 없다. 걸어서 5분 거리의 짧은 여정을 포기하고, 집으로 향하는 길목에 난 여섯 개의 샛길 중 어느 하나를 랜덤으로 골라 크게 우회해본다. 집과 회사라는 두 점 사이에서 내 발자국이 그리는 오늘의 궤적은 어떤 모양일까, 생각하며. 커다란 창마다 노란 불빛이 둥글게 담긴 건물을 지나쳐 발길 닫는 대로  걷지만,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목적을 잊어본 적은 없다. 걷는 동안 가요를 듣거나, 자주 듣는 팟캐스트의 철 지난 에피소드들을 다시 듣기도 하는데, 밤의 소음이 좋아서 아무것도 귀에 꽂지 않을 때가 더 많다. 비르하케임 다리를 건널 때 때마침 반짝거리는 에펠탑이나 덜컹덜컹 부드럽게 커브를 돌아 사라지는 6호선 지상철이나, 카페테라스에서 웅성거리는 다정한 말소리, 횡단보도 앞에서 올려다본 까만 허공에 조그맣게 걸린 손톱달 같은 것들에 젖다 보면 회사의 잔상도 천천히 옅어진다.


집으로 가기 전엔 늘 슈퍼마켓에 들른다. 키친타월이나 수세미, 사과나 맥주, 칩스 따위의 자질구레한 것들을 꼭 하나씩 산다. 냉장고가 가득 찼을 때는 조그만 젤리 한 봉지라도 사서 들어온다. 꼭 무슨 의식처럼. 빈집에 빈손으로 들어가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래서 집이 가까워질수록 생각이 분주해진다. 집에 필요한 게 또 뭐가 있었더라? 몹쓸 소비 패턴이다. 해먹지도 않을 파스타 병소스나 참치캔, 결국 다 썩혀 버릴 과일 같은 것이 집안에서 떠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지만 저녁 시간 즈음 불이 환하게 켜진 슈퍼마켓에 들어가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길게 늘어선 계산대 줄에 합류해 내 차례를 기다릴 때면, 저녁거리를 고민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풍경 속에 내 자리도 있는 것 같다. 영수증을 받아 들고 슈퍼를 나서면 참 신기하게도 그림자는 어느새 가벼워져 있다. 그러니까 비로소 집에 돌아가고 싶어 진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것도 운동이랍시고 피로감을 느낀 건지, 일터의 잔상을 지우고 마침내 삶으로 돌아갈 채비가 끝난 건지. 하지만 그림자가 유난히 무거웠던 이유는 안다. 회사 사람들에게 느끼는 '가짜 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회사 동료도 사람이라고, 그 온기를 떠나 아무도 없는 빈집으로 향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사람과 살을 부비고 마음을 나눌 일이 좀체 없는 내가 저지르는 '실수'다. 가끔, 어쩌면 자주 나는 회사 동료, 혹은 상사들의 온기를 사람의 온기로 착각하곤 한다. 그들과 유연한 공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적정한 정서적 거리를 지키다가도, 어느 날은 (동료로서 건네는) 따뜻한 말이나 (동료로서 보내는) 공조나 공감의 눈빛 같은 것에 와르르 무너진다. 그런 날이면 꼭 '집에 돌아와 후회할' 감정이나 이야기들을 친구도 지인도 뭣도 아닌 동료에게 들려주고 만다. 꼭 배를 드러내고 벌렁 누운 강아지처럼. 다시 혼자가 되면 하루를 곱씹으며 그게 나중에 어떤 부메랑으로 어떻게 돌아올지 걱정할 거면서.


짧은 회사 생활 동안 꽤 많은 일들을 지켜보았다. 무심결에 뱉은 감정적인 말이나 비밀스러운 고백, 뒷담화 같은 것들이 돌고 돌아 나쁜 평가의 사유가 되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누군가의 앞에서는 웃는 낯을 하고, 뒤에서는 그의 해고에 찬성표를 던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 번의 실수는 만회하는데 지극한 시간이 걸렸고, 결국 만회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내쫓긴 사람도 있었다. 입사했을 무렵, C상사는 나를 포함한 신입 여사원들을 데리고 다니며 자주 점심을 사 먹이곤 했다. 거절할 수 있다는 생각도, 용기도 그때는 없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 개인적인 부탁을 가져오며 "밥 얻어먹었으니까 이 정도는 해야지"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그때 나는 일터에서 이유 없는 친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 이후로 나는 절대로, 밥을 얻어먹지 않고 불가피할 경우 반드시 다른 방식으로 갚는다). 이 곳에서 온기란 공적 관계의 윤활유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 가짜 온기에 속아 속마음을 다 드러내면 다친다는 것, 경계하고 방어해야 나를 지킬 수 있다는 것도.


나는 가짜 온기가 두렵다. 가짜 온기에 속으면 직급과 책무와 상명하달 혹은 협업의 관계 너머로 '인간 대 인간의 소통'이나 '마음’ 같은 것을 기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를 자꾸 '부적절'하게 만든다. 부적절하게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게 하고, 부적절하게 내 생각을 들려주게 만들며, 부적절하게 이유 없는 호의를 베풀게 만들고, 부적절하게 따뜻한 눈빛을 바라게 한다. 최근 나는 아주 쉽게, 자주 부적절했다. 그런 날이면 회사의 잔상을 집까지 끌고 온다. 내가 왜 그랬을까, 이를 닦으며 번민하고 이불속에서 후회할 거면서. 아무래도 온기가 많이 고픈 것 같다. 나를 알아주는,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의 '진짜 온기'가 있으면 좋겠다. 그럼 매일매일 내 가장 젊은 날을 루팡해가는 파렴치한 사무실에 해가 지도록 머물 일도, 잡다한 생활용품을 사들일 일도, 어두운 거리를 혼자 오래도록 서성일 일도 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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