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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Jul 28. 2018

#04. 나의 베드버그 소탕기

바람잘 날 없는 프랑스 생활

얼마 전 베드버그와의 전쟁을 치렀다. 그냥 벼룩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소파도 카펫도 점령한 전적을 보면 놈의 서식지가 '베드'만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니까. 벌써 두 번째다. 처음 벼룩 신고식을 치렀던 것은 지난가을이었다. 내 집에서 첫 밤을 보낸 J의 온몸이 빨간 반점 투성이었다. 같은 침대를 썼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던 나는 J의 컨디션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두드러기 약을 발라 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벼룩도 모기처럼 한놈만 패는 습성이 있어서 무는 놈만 문다고 한다. 뭐 이런 상식을 떠나서도 지금이 16세기도 아니고, 초가삼간도 아닌 이 현대식 건물에 '설마' 벼룩이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온갖 더러운 때가 덕지덕지 낀 지하철 의자나 비에 젖은 신발을 신고 집안의 카펫 바닥을 지분거리는 인간들을 생각해보면 사실 놀랄 일도 아닌데 설마 그 벼룩이 내 집에 옮아올 줄이야.


J가 아무래도 베드버그가 있는 것 같다고 했을 때 그럴 리가 없다며 부정했다. 이사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았고 침대도 새 것이었으니 정말로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벼룩과 동침하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한 건 J가 손수 침대 위를 기어가던 벼룩을 터뜨려 피를 본 후였다. 우리는 즉시 벼룩 소탕에 들어갔는데 1. 방역을 부른다 2. 오염된(?) 옷을 버린다 3. 이불, 베개, 나머지 옷을 세탁방에서 95도씨에 빤다 4. 방역 후에는 4시간 동안 방을 밀폐하고 2시간 환기를 한다 (고 했지만 그날은 아예 호텔에서 잤다) 5. 일주일 후 2차 방역을 한다 의 순서대로 전쟁 같은 시간을 보냈다. 4번 순서를 마치고 J는 한국으로 돌아갔는데 눈두덩이를 물려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J가 다행이라고 자긴 괜찮다며 깨발랄하게 웃을 때 결국 나는 펑펑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럴 리 없다고 우겼던 내가 멍청이 같고 J의 여행을 망쳐버렸다는 죄책감과 미안함 때문이었다.


한동안은 고요를 되찾았다(고 생각했다). 2주 전 침대 위에 엎드려 노트북을 보다가 유유히 베개 위를 횡단하는 시커먼 벼룩을 발견하고 줘터뜨리기 전까지는. 그 후로 아주 작은 새끼 벼룩을 두 마리를 더 잡았고 그중 한 마리는 맛없는 피라도 빨아보겠다고 내 팔뚝을 한방 문 후였다. 침착하게 (라고 하기엔 이것 때문에 한동안 너무 우울했는데) 1번부터 4번까지의 절차를 재차 밟았다. 다른 점이라면 이번엔 돈을 더 주고 훨씬 독한 약을 쓰는 방역을 불렀다는 것과 소파, 침대, 이불, 베개를 몽땅 갖다 버리고 새 것으로 사 왔다는 것인데 혼자서는 몸집이 큰 집기를 사는 것도, 버리는 것도 정말 큰 일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 많은 일을 다 치러냈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하니 믿기지가 않는다. 새 침대는 창가에 놓아 매트리스를 볕에 노출시킬 수 있게 했고, 소파 겸 침대라 침대 밑 구석구석을 청소할 수 있게 했다.


잔잔한 일상 곳곳에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일'들이 매복된 지뢰처럼, 개구리가 들어있는 선물상자처럼 (잊을 만하면) 짠, 나타난다. 그럴 때마다 이놈의 나라 뜨고야 말겠다고 이를 박박 갈지만 그렇게 이만 갈면서 버텼던 시간이 햇수로 꼽자면 오 년째다. 참 험난했던 경험이 많은데, 프랑스 출국 사흘 전 맹장염 응급 수술을 받고 복대를 찬 채 비행기에 올랐던 건 그 모든 것의 프리퀄 같은 게 아니었을까. 느닷없이 날아든 전기세 폭탄 고지서, 리옹 시내 한복판에서 마그렙 놈들에게 어깨빵(?)과 조롱을 당하고도 욕 한마디 못한 게 분해 엉엉 울었던 밤, 아파트 자물통을 뜯고 들어와 새 노트북과 전자기기를 몽땅 집어갔던 도둑놈, 악덕 집주인에게서 끝끝내 돌려받지 못한 보증금, 루브르 역에서 사라진 핸드폰, 원인모를 두통으로 하루 걸러 병원을 전전하던 고통스러운 날들과 MRI에 찍힌 물혹이 종양인 줄 알고 긴급 귀국했던 일화, 새 집으로 이사한 날 어딘가에서 풍기는 곰팡이 악취에 시달리다가 2주 만에 페널티를 물고 나왔던 일 등은 이제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이 되었다.


2009년 리옹에서는 짐을 푼 지 얼마 되지 않아 아파트 내 가스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일요일 저녁 여섯 시 무렵이었다. 숙취에 시달리던 나는 오후 느지막이 일어나 침대에서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펑, 하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건물이 출렁였다. 침대 옆에는 커다란 창이 있었는데, 그 순간 (상점 셔터처럼 올렸다 내렸다 하는) 두꺼운 겉창이 안쪽으로 크게 우그러졌고 잠겼던 창문이 퍽 열리면서 나는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너무 놀라 한동안 멍하게 있다가 문을 열었는데 복도가 온통 매캐한 연기로 가득했고 스프링 쿨러에서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샤워가운을 입은 사람, 실내 슬리퍼를 신은 사람, 개를 품에 안은 사람 등등 '일요일 저녁의 무방비 상태'의 사람들이 일제히 비상구를 향해 뛰고 있었다. 나도 한국에서 챙겨 온 현금 다발(심지어 은행 계좌도 열기 전)을 가방에 넣고 추리닝 차림으로 뛰어나왔다.


바깥은 더욱 아비규환이었다. 건물 앞에는 커다란 소방차들이 줄지어 서있었고, 머리 위로는 시커먼 연기 기둥이 솟구쳤다. 입구의 전면 유리는 죄다 터져있었다. 살겠다고 뛰쳐나온 입주민들은 건물 건너편의 실내 체육관으로 인도되었는데 진화작업이 끝나고도 건물 붕괴 위험을 이유로 출입을 금지당했다. 적십자가 실내 체육관에 쳐준 텐트에서 잠을 자고 세면도구 키트로 씻고 전쟁식량(?) 같은 것을 먹으며 반 거지꼴로 지내다가 어학원 지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며칠을 보냈다. 임시 기숙사를 배정받은 건 한참 후였는데 소방 대원들의 엄호 아래 짐을 챙겨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먼 교외에 위치한 기숙사의 위험하고 열악한 환경 때문에 서둘러 새 집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 서툰 불어로 발품을 팔았던 시간과 비를 쫄딱 맞으며 세간살이를 실은 캐리어와 장바구니를 질질 끌고 한참을 걸었던 이삿날을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매끈하고 예쁜 기억만 있었다면 더 행복했을까? 참 이상하게도 결국 웃으며 떠들게 되는 건 언제나 울퉁불퉁한 시간들이다. 요철 사이로 많은 이야기가 담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좋은 기억도 덩달아 선명하게 남는다. 리옹에서 사고를 겪으며 만났던 인연(모임의 이름은 '폭파'였다)과 그 후로 꽤 오랜 시간을 교류하며 보냈는데 다정하고 유쾌한 기억들이 패치워크처럼 조각조각 기워져 있다. 그때 만난 H와는 같은 건물에 나란히 집을 구해 자전거도 타고 여행도 다니는 좋은 이웃이자 친구가 되기도 했다 (같이 누텔라를 퍼 먹으며 사이좋게 벌크업했던 호시절이었다). 벼룩에 물려 눈두덩이가 퉁퉁 부운 J와 눈물 잔치를 했던 웃긴 밤도, 방역 후 우울하게 호텔방에 있던 내게 치킨을 사들고 찾아온 S도 아마 벼룩만큼 오래오래 기억하게 될 것이다. 물론 벼룩과 동침은 이제 절대 사절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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