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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폼폼 Nov 13. 2021

교사의 소진 : 늦은 밤 온 연락에 네 이름이 보일 때

교사와 사람 사이, 그 적절한 지점이 있을까

 어느덧 1년이 넘었다. K가 떨리는 손, 붉어진 눈시울과 함께 가정환경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털어놓은 지가 1년이 넘었다. 작년 6월 말 즈음, 아이는 자신이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워낙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고 꽁꽁 숨겨왔던 아이인지라 갑작스레 내보인 아이의 마음에 내 마음이 많이 놀랐다. 하지만 한편으론 내게 속내를 털어놓아준 게 너무 고마웠고,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에 그만 아이에게 깊숙이 이입해버리고 말았다. 그 후로 어떻게든 도움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마음으로 아이가 원할 때면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1시간, 2시간씩 해가 지도록 아이와 상담을 했다. 퇴근 후 아이에게 전화가 오면 2-30분씩은 통화를 하며 들어주고 힘을 다해 다독여주었다. 때로는 같이 울컥하기도 했고, 그런 날이 주말일 때도 있었다. 통화의 끝자락에 수화기 너머로 건네는 아이의 고맙다는 말은 그 시간을 보상해주곤 했다.


 내가 아이에게 기댈 곳을 아주 선뜻 내어주었기 때문에 아이가 내게 기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누구에게 쉬이 마음을 열지 않는 아이인지라 아이는 내가 반가웠을 터였다. 그런 든든한 존재가 되어주는 것이 내가 교사가 된 이유이자, 교사로서 응당 해야 하는 일인 것 같았다.


 작년 이맘때 즈음이겠다. 아이와 가까워지고 5개월 즈음 지난 시점이었다. 모처럼 타지에 놀러 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주말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저녁을 무얼 먹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던 찰나에 K에게 문자가 왔다. "샘", "샘", "샘". 아이는 나를 몇 차례 부르더니 한 두 개의 메시지를 삭제했다. 카카오톡에 뜬 아이의 이름을 보자마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좋은 이유로 온 연락이 아닐 테니까. 사실 좋은 연락이라 하여도, 주말이나 퇴근 후에 오는 연락은 아무래도 온전히 반갑지만은 않은 게 솔직한 마음이다.

 질문할 게 있다던 K는 "샘, 사람들은 왜 살아요?", "그럼 저는 왜 살아요?"라고 묻더니 이어서 "살고 싶지 않아요."라고 했다. 1년이 지난 일임에도 그 연락을 본 순간 내가 어떤 기분을 느꼈었는지 아직 생생하다. 마음에 쇳덩이가 덜컹 내려앉는 듯한 무게감과 그 심적 부담감으로 인해 맛있는 저녁을 먹으려던 기대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입맛이 떨어졌다. 입맛이 떨어졌다는 표현이 어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의 나는 정말이지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경험을 했다. 주말 동안 열심히 채웠던 배터리가 순식간에 훅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짜증이 확 나면서 울고 싶은 마음이 드는 동시에 이런 감정을 느끼는 내 모습에 대한 실망과 죄책감이 따라왔다. 인간으로서 드는 감정을 억누르려니 내 마음이 더 싫다고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이게 화가 나는 건지, 짜증이 나는 건지, 당황스러운 건지, 힘이 들어서 그런 건지 한 마디로 형용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몇 달 전부터 위기 상황이라는 신호를 보내온 아이이기도 했고 가능성이 크지 않더라도 혹여나 무슨 일이 발생할 수 있으니 담임 선생님, 상담 선생님, 교감 선생님께 공유 및 보고를 드린 뒤, 아이와 메시지를 나누며 잘 다독였다. 혹시나 하여 아이와 나눈 카톡을 교감 선생님께 캡처하여 보내드렸는데, 교감 선생님께서는 아이에 대한 걱정이 앞서신 나머지 아이에게 좀 더 친절하게 답장을 해주라고 하셨다. 내 입장에서는 마음속의 쇳덩이를 꾸욱 누르는 것만 같은 말이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담임교사인 나의 소진을 걱정해 주신 분이 상담 선생님이셨다. 아이의 스트레스 요인이 가정환경이었기에 학교에서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뾰족한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1년이 넘게 여기저기 기웃대며 해결 방안을 찾는 과정을 밟고 있다. 긴 여정이다. 학생이 위기 상황에 놓이면 대책 회의를 진행한다. 그 회의에서 상담 선생님이 내 손을 잡아주지 않으셨다면 난 점차 시들어 갔을 것이다. 주말과 밤낮 할 것 없이, 게다가 큰 심적 부담이 될 수 있는 내용이 담긴 연락을 계속 받아줘야 하는 담당 교사의 소진이 걱정된다고 말씀해 주시는 순간은 내겐 너무 큰 위로였다. 요령 없이 소진되고 있었던 나를 알아보신 걸까. 회의가 끝난 뒤 상담 선생님께서는 아이가 상담을 원할 때에는 미리 약속을 정하고 일과 시간에 할 수 있도록 정중하게 말해보라고 조언해 주셨다. 같은 상황이 지속될 경우 자칫하면 내가 아이에게 휘둘릴 소지가 있고, 선생님께서 아이를 계속 케어하려면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고. 그게 아이한테도 좋은 거라고.


 아이가 원할 때, 힘들다고 할 때 만사 제치고 내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 위기에 처한 아이를 위해 교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 하지 않으면 내가 나쁘고 무책임한 교사가 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몇 달을 보내고 나니 K에게 온 연락만 보면 또 무슨 일인가 싶어 마음부터 무거워졌다. 심적 부담과 두려움은 아무래도 즐거움과 공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평일 퇴근 후 시간이든 주말이든 내가 보내고 있던 시간이 모조리 회색으로 변해버리는 경험을 몇 차례 하고 나니 마음이 힘들고 무기력해졌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용기 내어 상담 선생님의 조언을 실천하기로 했다. 어렵게 입을 떼어 K에게 말했다. 선생님도 퇴근 후의 일정이 있고, 항상 열려 있을 수는 없으니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에는 규칙과 약속을 정해서 하면 좋겠다고. 왜 진작 이렇게 하지 못했을까 싶을 만큼 아이는 선뜻 내 입장을 이해해 주었다. 내 입장을 에둘러라도 말하고 나니 조금은 마음의 공간이 생긴 것 같았다. 더욱 다행인 것은 그렇게 한 해를 보내며 꾸준한 상담을 통해 해소할 기회를 준 덕분인지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도 부정적인 생각이 많이 정화된 듯했다. 그렇게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는 겨우 벗어난 듯 보였다.


 그럼에도 아직 근본적인 원인은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고, 때때로 아이는 답답한 마음에 내게 밤늦게 연락을 해온다. 사실 오늘도 꽤나 늦은 시간에 연락이 와서 노트북을 열고 이 글을 쓴다. 모처럼 혼자 영화를 보고 여운을 안고 나서는데, K에게 온 연락을 보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읽지 않고 기다렸다가 월요일에 읽을까 하다가 또 그런 성격은 못 되는지라 읽고 성심성의껏, 하지만 이전보다는 감정을 덜 담아 답장을 해주었다. 영화의 여운은 진작에 흩어지고 말았다. 누군가가 강요한 적도 없는데 답장을 안 하면 나쁜 교사가 되는 것만 같다. 그게 작은 연락이든 큰 연락이든 간에 말이다. 머리로는 아님을 아는데도 대차게 선을 그을 수가 없다. 이런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충전해야 할 시간에 소진되고 마는데, 남은 교직 생활 동안 이를 어찌 지혜롭게 대처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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