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하려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수업하는 교실 옆에는 화장실이 있다. "선생님, 휴지 있어요?" 아이들은 세상 급한 얼굴로 종종 휴지를 빌리러 오곤 한다. 그날도, 그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 혹시 휴지 좀 빌릴 수 있어요?" "어, 여기 휴지는 없고 키친타월만 있는데, 왜?" "아, 갑자기 제가 삘이 와서요." 휴지가 아니라 키친타월인지라 여러모로 조심해서 쓰고 처리하라는 당부를 하고 빌려주었다. 그 후로 그 아이는 한두 번 더 휴지를 빌리러 왔다. 몇 번 보고 얼굴이 눈에 익자 반갑기도 했다. "어, 너 그때도 왔던 것 같은데? 여러 번 빌려 갔으니까 나중에 우리 교실에 휴지 갚든지 맛있는 거 하나 줘야 된다~"라는 농담과 키친타월을 함께 쥐어주며 보냈다.
그리고 몇 분 후, 아이는 화장실에 갔다가 다시 왔다. 수업 시간일 텐데 교실에 안 가고 왜 나한테 왔는지 의아했다. 왜 다시 왔냐고 물으니, 할 말이 있어서 왔다고 한다. 아이는 우물쭈물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다를 반복했다. 그러고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전혀 감이 안 잡힐 만한 말들을 에둘러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번에 제가 휴지 빌려갔을 때 있잖아요, 로 열린 말문은 화장실의 구조를 설명하다가, 화장실에 있는 거울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닌데, 아 이거 말해도 되는 건가, 선생님이 그때 교실에서 나오셨는데, 이런 이야기로 이어지고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아이는 비슷한 내용으로 몇 바퀴를 돌리더니 끝내 본론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갸우뚱하고 있자니 아이의 말투, 표정, 내용으로 형성된 분위기가 내게 말했다. 듣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아무리 최근 기억을 더듬어봐도 딱히 아이와 따로 마주친 적도,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도 없었기에 무슨 이야기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멈추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처음에 내비쳤던 궁금한 기색을 거두고 아이에게 말했다. "선생님은 너한테 휴지를 빌려준 날, 너에 대한 기억은 휴지를 빌려갔다는 것 하나밖에 없어. 그래서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지 선생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긴 한데, 어쨌든 말하기 곤란한 얘기면 안 해도 돼~" 아이는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여전히 우물쭈물 거리며 말문을 열었다가 닫았다를 반복했다. "말하기 힘든 이야기면 억지로 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얼른 수업 들어가라~"
아이를 보내고 잠시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딱히 짚이는 게 없어 그 기분은 금세 흩어졌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오늘, 아이는 캔 콜라 하나를 가지고 내가 있는 교실에 찾아왔다. 웬일인가, 싶어서 물었더니 휴지 빌려주면서 내가 맛있는 거 달라고 했던 말을 지키려고 왔다고 한다. 오늘 교내 행사를 하면서 받은 콜라를 건네길래 극구 사양했다. 포기를 모르고 건네기에, 받아서 옆에 두었더니 안 드실까 봐 먹는 걸 보고 가겠다고 한다. 무심코 던진 말을 기억하고 있었음이 기특하고 멋지기도 하고 내가 안 먹을까 봐 콜라를 마시는 걸 기어코 보고 가겠다는 모습이 귀여워서 종이컵에 따라 콜라를 나누어 마셨다. 그러고는 함께 교실을 나서 계단을 내려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이는 집으로, 나는 교무실로 갔다.
아이를 보내고, 문득 그때 우물쭈물해하던 아이의 얼굴과 장면이 떠올랐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때의 분위기는 아직 꽤 생생했다. 여러 번 마주치다 보니 기억에 남긴 했지만, 최근에 전학을 온 아이인 데다 수업을 들어가지 않는 학년이니 어떤 성향의 아이인지 파악할 길이 없었다. 어떤 아이인지 궁금해졌다. 마침 퇴근할 준비를 하고 계신 동료 선생님께 물었다. "쌤, ㅎ는 어떤 애예요?"
선생님은 살짝 뜸을 들였다. 그 찰나, 어떤 대답이 나올지 알 것 같았다. 아이가 우물쭈물했던 그날과 비슷한 직감이었다. 입에서 예상했던, 그러나 실제로 들으니 꽤나 충격적인 말이 이어졌다. 교실에서 딱히 문제없이 얌전하게 잘 지내는 학생이긴 한데, 교사 성추행으로 강제 전학을 온 학생이라는. 혹시 모르니 선생님도 조심하라는 말도 함께.
그 말을 듣고 일단 바로 든 생각은, 그날 감지된 분위기가 괜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 그리고 그날 아이가 하려던 말을 듣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었다. 아이가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앞으로 ㅎ가 나를 찾아오는 날이면,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 아이를 일단 경계하고 볼 것이다. 아이에 대한 선입견이 생긴 것이다. 나는 ㅎ를 다시 멋진 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늘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전처럼 친하게 반기며 대할 수 있을까.
선입견은 대개 부정적인 것으로 그려질 때가 많다. 나 또한 일부 동의하는 바이다. 경험상 내가 세운 선입견이 내게 도움을 줄 때보다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은 게 사실이니까. 특히 사람에 대한 선입견은 더더욱 그렇다. 교직에 있으면서 아이든 동료 선생님이든 누군가를 만나기에 앞서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미리 얻고, 그 사람에 대해 확인되지 않은 이미지를 내 멋대로 그 사람인양 단정 지어, 진짜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어리석은 짓임을 몇 차례 느끼곤 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누군가를 내가 직접 겪기 전까지는 딱히 그 사람에 대해 열심히 알려고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아이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는 학교 자체에서도 선생님들 간에 공유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다시 생각이 많아질 것 같다. 특히 교사가 아이에 대해 선입견을 가진다고 한다면 대개 부정적인 느낌으로 입에 오를 때가 많은데, 내가 이번에 느낀 것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릴없이 작동하는 경계심이었다. 아이가 아니었어도, 동료 교사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거라면 이것은 교사가 아이에 대해 갖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람이 사람에게 갖는 것이라 보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든다. 그날 ㅎ가 내게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내가 ㅎ를 그리 생각하는 게 적절한 걸까, 그 아이가 과오를 씻고 성장하려면 선입견 대신 아이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을 보내보는 것이 맞지 않나.
아이에 대한 정보를 미리 듣는 것은, 그러다 그 아이에 대한 선입견이 생기고 마는 것은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