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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폼폼 Jul 25. 2023

교사의 내적 갈등 : 나를 위할까, 학생을 위할까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싶지만 상처 받는 건 힘들고 두려워서

 퇴근하는 골목길, 담배를 금방 막 끈 듯한 우리 학교 학생들을 마주쳤다. 담배 냄새가 아직 그들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지만, 물증으로 삼기엔 담배 냄새는 눈에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았다. 만약 그들을 지도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오직 심증으로만 맞서야 했다. 머리는 응당 지도해야 한다고 내게 말했지만, 시커멓게 여럿 모여있는 아이들이 마음으론 두려웠다. 3년 차였던 나는 그들에게 여기서 뭐 하고 있었냐는 질문을 어색하게 던져둔 채 골목을 지나 빠져나갔다.


 골목을 빠져나왔을 때의 복잡한 기분은 나를 오래도록 괴롭혔다. 순간 두려움을 느낀 것도 부끄러웠고, 그로 인해 지도하는 쪽을 택하지 못한 내가 너무 작게 느껴졌다. 자존심이 상하면서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웠다. 합리화를 하고자 흡연 사안은 직접 목격하지 않는 이상 처벌하기가 어렵다고 했던 부장님의 말을 떠올렸다. '내가 지도하려 들었어도 이미 남은 건 냄새뿐이었으니 별 방법이 없지 않았을까.' 그러나 애써 나를 위로하기 위해 떠올린 생각조차 구질구질하게 느껴졌다. 지금은 그때의 나를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때만큼은 교사로서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


 그때의 기분은 시간이 지나 부끄러움으로, 자책으로, 실망으로 모양을 바꾸다가 비로소 명료해졌다. '그래도 선생님인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쪽팔림.



 그로부터 시간이 좀 흐르면서 그때의 나를 이해하고 용서하게 된 이유는 아주 많을 것이다. 어렸으니까, 요령이 없었을 때니까, 애매한 상황이었으니까 등의 이유를 들며 자기 합리화에 성공한 것도 나를 이해하는 데에 한몫했겠지만, 그 후 몇 년간의 경험 또한 이유가 되었다. 마음 써서 지도한들 아이가 잘못을 인지하기는커녕 교사만 다치고 상처받는 경우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했고, 많은 선생님들 또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지도해야 하는 상황에 눈을 감으시는 경우도 많이 목격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씁쓸한 경험은 대단한 상황에서 얻어지는 것만은 아니었다. 차라리 대단한 상황이라면 조금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 가령, 상습적으로 수업 시간에 대놓고 엎드려 자는 아이에게 일어날 것을 요구하면 죄송함을 표하며 잠을 깨기 위해 노력하는 학생은 보기 드물었다. 왜 깨우냐는 듯한 짜증이 돌아올 때, 욕이 섞여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깨우는 날도 있었다. 교사도 상처에 약한 사람인지라 좋은 말로 부드럽게 깨우는 쪽을 선택하면 일어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상대가 상냥한 사람임을 인지한 몇몇 학생은 아침 단잠을 깨운 엄마를 대하는 것 마냥 짜증을 쏟아낸다. 다른 학생들 앞에서 느끼게 되는 머쓱함과 민망함은 덤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는 학생을 깨워 함부로 교실 뒤 또는 밖으로 내보내 서 있게 할 수도 없다. 결국 다른 학생의 수업에 지장을 줄 수 없으므로, 그리고 교사 또한 감정만 소모하는 무의미한 실랑이를 원치 않으므로, 구석에서 자는 학생을 못 본 체 해버린다.


 이전 학교에서 유난히 그런 학생들이 많았던 것일까. 맞은편에 앉아 계셨던 선생님께서는 수시로 무단결석을 하는 담임반 학생에게 출석 독려 문자를 보내셨다가 본인이 학교에 가든지 말든지 선생님이랑 상관없지 않냐는 내용의 답장을 받으셨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고, 혹여나 졸업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 건넨 걱정스러운 마음이 상처로 돌아온 상황을 듣고 있자니 너무 화가 나고 김이 샜다. 그러한 답장을 보낸 학생이 평소에 예의 바르게 했을 리 만무하다. 조퇴증을 끊기 위해 담임교사를 찾아왔으나 교무실에 계시지 않자 쌍욕을 흩날리며 돌아가곤 하는 학생이었다. 그 장면을 보고 원칙적으로는 지도해야 마땅했겠으나, 말조차 섞고 싶지 않았다. 이처럼 안하무인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학생이었는데 그 선생님의 그릇은 얼마나 넓고 강하셨던 건지. 그 학생이 졸업하는 날까지 품어주려 애쓰시던 선생님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더불어, 나는 더욱 강해져서 무뎌지는 능력을 키워야 하는 것인지 내 마음을 살펴 가며 살아야 하는 것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은 현재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로 벌어지고 있다. 수업 시간에 교실에 들어가면 내 교과가 들지 않은 요일이 제일 좋다고 큰 소리로 말하는 학생, 이전 선생님이 더 좋았다며 비교하는 학생도 있다. '교사라면' 당사자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예의가 아닐 수 있음을 짚어주며 가르쳐야 함을 알지만, 좋게 말했다가 몇 차례 상처받은 마음은 지도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바뀌어 못 들은 척 나를 방어한다. 저번 달에는 수시로 엎드려 자는 학생을 깨웠더니 안 자는데 왜 잔다고 난리냐는 짜증을 들었다. 몇 차례 좋은 말로 깨웠던 적이 있었던지라 그날은 단호하게 대했더니 책상을 주먹으로 쾅 내리치는 것이 아닌가.


 슬프게도, 몇 차례 알려주었음에도 자신이 잘못한 게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학생에게는 교사로서 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없다.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상황은 너무나도 어렵다. 그냥 둘 수도, 다른 학생의 수업시간을 빼앗아가며 그 아이를 지도하고 있을 수도, 같이 책상을 칠 수도, 나가라고 또는 나오라고 할 수도, 학생에게 심한 말을 할 수도 없다. 자칫하면 아동 학대를 한 교사가 되어 버릴 수도 있는 요즘은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그날, 학생이 책상을 내리치던 순간, 그다음을 어찌 전개해야 적절할지,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많이 고민해야 했다. 더욱 강하게 나가면서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고 어렵사리 승기를 잡을 수 있었지만, 이런 과정은 참으로 보람 없이, 진이 빠진다. 그 후로 그 학생이 또 잠을 자고 있을 때면 때로는 못 본 척 나를 지키기도 했다.


 이처럼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요즘은 상황에 따라 지도하지 않는 쪽을 '나의 의지로' 선택할 때도 있다. 학생을 위하는 쪽보다는 나를 위하는 쪽을 선택하는 날. 지도하지 못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던 몇 년 전, 지도하지 않는 내가 부끄러운 지금. 그럼에도 부끄럽기를 선택하는 나, 어려운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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