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새벽 5시에 전화가 왔다. 한국은 7시겠지만, 나는 자다가 전화를 받았고 오랜만에 수다를 떨었다. 오늘은 늦잠을 자고 천천히 일어나고 싶었으나 그렇게 또 하루를 일찍 시작하였다.
셋째의 생일이 1월 31일이고 남편은 전날인 30일 방콕으로 오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첫 해외여행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어머님이 함께 오고 싶다고 하셨고 첫 가족해외여행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평생 일만 하고 사신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고 유쾌하신 편이라 함께 해도 괜찮겠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버님도 함께 오신다고 하신다. 아버님은 투박한 어른이고 성격이 너무 급하고 천천히 구경하는 것을 어려워하시는데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그러자고 했다.
시부모님의 수영복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아가씨와 통화하면서 내가 먼저 아가씨네 둘째(둘째와 나이가 같고,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다.)도 보내면 어떻겠냐 제안했고 그렇게 조카도 오기로 했다.
이 과정이 잘 합의되어 한 번에 결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씩 하나씩 변경되며 결정된 것이고 나는 나대로 아이의 생일을 맞아 그때는 좋은 숙소에서 자자고 미리 예약을 해둔 터라 어머님네의 숙소를 예약했고 여기에 13살인 조카가 오기 때문에 인원을 추가해야 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오늘은 이 숙소에 전화를 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예약한 앱으로는 취소, 변경이 불가하며 그런 경우 환불불가한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전화를 해서 부족한 영어실력의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어찌어찌 단어 몇 개를 섞어가며 나의 상황을 말했고 숙소에서는 예약한 앱과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는 답변을 주었다.
앱을 뒤적이니 고객센터와 채팅으로 상담이 가능하였다.
그랩을 이용하는데 그랩에서는 나는 한국어로 메시지를 보내면 기사님은 태국어로 자동번역이 되고 마찬가지로 기사님이 보낸 태국어 메시지는 자동으로 한국어로 번역이 되었다.
나는 이 앱도 그런 기능이 있는 줄 알고, 한국어로 나의 상황을 보냈는데 돌아온 답변은 자신은 한국어를 알지 못하니 영어로 써달라는 것이다.
그래도 번역앱을 돌릴 수 있으니 어찌어찌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아이들은 느지막이 일어나 배가 고프다고 한다.
어제 봐두었던 식당으로 가서 아침을 먹기로 했으니 아직 해결되지 않았으나 우선 숙소를 나섰다.
둘째 녀석은 조금만 걸어도 왜 이리 멀리 가느냐며 투덜거린다.
이 녀석, 또 투덜거리기 시작하고 나는 예민해진 상태이니 아이의 투덜거림에 민감해진다.
결국 아침 식당에서 아이에게 시 두 편을 암송하라고 이야기했다.
아이는 억울해하지만, 또 받아들인다.
그렇게 맛있는 아침을 먹고 숙소로 돌아와 아이는 시를 외우고 있다.
처음에는 내가 인터넷에서 시를 찾아주었는데 그 시가 길다고 하여 내가 읽으려고 가져온 시집이 있으니 거기에서 아이가 고르도록 했다.
아이는 그 시집에서 가장 짧은 시를 골라 외웠다.
사막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오르텅스 블루(류시화 옮김)
내가 가져온 책은 '류시화의 시로 납치하다'인데 시의 배경, 작가의 삶도 함께 있는 책이다. 아이의 시를 들으며 곁의 글을 읽는데 그녀의 삶이 다가온다.
아이에게 그 부분을 읽어주는데 장난치기 좋아하고 책 읽기를 싫어하는 아이의 눈빛이 순간 진지해지는 것을 보았다.
아이에게 시인의 삶을 듣고 나니 어떠냐 물었더니 조금 다르단다.
그 사이 숙소의 일도 해결이 되었고 시 한 편에 조금 어지러웠던 나의 마음도 가라앉았다.
점심은 다시 15분가량 걸어가야 하는 맛집을 가보기로 했다.
오늘은 정말 끄라비의 백수 같은 하루이다. 오후, 둘째의 회의가 있어 움직이기 애매한 날이기도 했다.
점심 먹고 둘째를 제외한 우리는 마사지를 받기로 했다.
둘째는 자신은 뛰어간다더니 어느 간판 뒤에 숨어서 우리를 놀래키려고 했고 그것을 본 나는 사진에 담으려고 장난을 치며 돌아가는 길이었다.
둘째는 숙소로 우리는 마사지샵으로 들어갔는데 우리가 들어간 곳은 의자가 조금 부족해 자신들의 또 다른 샵으로 안내해 주었다.
세 명이 들어가 앉는데 직원이 한 명의 아이는 어디 갔느냐고 묻는다.
둘째는 마사지샵 인근에도 가지 않았는데 아이가 한 명 더 있는 걸 안다는 것이 신기했다.
알고 보니 둘째가 우리에게 장난치느라 숨었던 어느 간판이 이 마사지샵의 간판이었고 아이의 장난을 직원들은 가게 안에서 보고 있었나 보다.
우리를 마사지해 주면서 직원들은 서로 웃으며 이야기 나눈다.
거리를 지나가는 관광객을 보며 어느 나라 사람인지 맞추는 것도 같고 셋째가 간지러워 웃는 웃음소리에도 이야기를 나눈다.
나도 그들처럼 거리를 지나는 관광객을 본다.
제주도도 끄라비처럼 관광 오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제주도에 사는 우리를 부러워하지만, 때때로 휴가를 와서 지내는 그들이 부러운 날이 더 많았다.
삶과 여행은 한 끗 차이인 듯싶다가도 천지차이인 것 같기도 하다.
직원들의 웃음소리와 셋째의 웃음소리로 가득한 마사지샵이다.
둘째의 회의가 끝나고 저녁은 야시장에서 먹기로 했다.
마시지를 받고 돌아가는 길, 야시장을 준비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나가보니 정말 야시장이다.
지금까지 갔던 야시장처럼 크지는 않지만, 소소하게 펼쳐진 야시장이다.
음료를 사고 아이들이 먹고 싶어 했던 케밥을 사며 아이들에게 잠시 테이블에 앉아 기다리라고 했는데 아이들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할아버지 한 분과 연인.
처음에는 세 분이 가족인가 보다 했는데 이곳에서 만났다고 한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오랜만에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니 너무 좋다.
70을 훌쩍 넘긴 할아버지는 자신도 제주에 산다고 하시며 할아버지 하시는 일을 말씀해 주신다.
매년 겨울이면 2달 동안 혼자서 이곳에 와서 지내신다고 했다.
그리고 매일 라일레이로 들어가신다고 하신다.
우리도 이제 숙소를 옮기고 나면 매일 라일레이로 들어갈 때 만나기로 했다.
그곳의 암벽등반도 알려주신다고 하신다.
할아버지를 꼭 만났으면 좋겠다.
나는 좋아하는 책이 있으면 두어 번은 또 읽는다.
좋아하는 영화를 또 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는 내가 20살에 방영된 고복수(양동근)와 전경(이나영)이 나오는 '네 멋대로 해라'라는 드라마이다. 내가 이 드라마를 너무 좋아해서 친구들이 드라마를 볼 수 있도록 CD에 담아주었는데 지금까지 20번은 넘게 봤다.
우울할 때면 이 드라마를 다시 본다. 그래서 미리 울고 미리 대사를 말하고 미리 감동을 받는다.
여행에서도 그렇다. 같은 거리를 또 걷고 또 걷는다.
그렇게 걷다 보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익숙해서 더 잘 보이는 것도 있다.
야시장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아이들은 또 아오낭비치를 가자고 한다. 그곳에서 그네를 타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또 아오낭비치를 갔다. 정말 이 숙소에서 지내는 동안 거의 매일 가는 것 같다.
사람들이 많아 그네는 타지 못하고 시간이 늦어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
셋째는 엄마가 돌아가자는 소리에 마음이 상해 자기 마음대로 빨리 가버리고 행여나 동생을 잃어버릴까 걱정되는 둘째는 셋째를 따라갔다.
첫째와 함께 걸으며 지친 나는 왜 우리는 여기를 매일 이렇게 걷느냐고 물었다.
"엄마, 매일 걷지만 우리는 매일 새로운 걸 발견해. 그저께는 새로운 식당을, 어제는 저 건물의 꼭대기의 종을, 오늘은 여기 코끼리상을. 매일 걸어도 매일매일 우리는 새로운 걸 발견하고 있어."
그렇게 우리는 또 우리가 사랑하는 로띠 아주머니에게 가서 어제와 똑같은 메뉴를 주문한다.
달라진 것은 오늘은 첫째와 나만 있는 것이다.
둘째와 셋째는 숙소로 들어간 것 같다.
로띠가 나오는데 셋째가 오고 있다. 그 뒤를 땀이 범벅인 둘째가 뛰어온다.
숙소 문을 장난친다고 안 열어주었는데 아이가 다시 나가서 동생을 잃어버리는 줄 알았단다. 그래서 또 그렇게 뒤쫓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