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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Aug 05. 2017

여름 = {축제, 축제, 축제}

내가 처음 할리팩스에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왜 휴양지로 가는 거냐'라고 물어보셨다. 바다 옆에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던 나에게 적당한 도시규모와 다양한 학교, 친절한 아틀랜틱 캐나다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할리팩는 매력적인 도시였다. 이 곳이 휴양지인 줄은 전혀 몰랐다. 도착해보니 바다와 선선한 여름 날씨, 그리고 매주 끊임없이 벌어지는 축제의 연속에서 휴가를 즐기러 온 사람들을 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밴쿠버나 토론토 같은 대도시는 더 자주, 더 크게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겠지만 작은 도시인 이 곳은 평소에는 매우 조용하다가 축제가 있을 때마다 도시 전체가 떠들썩해진다. 7,8월에는 매 주말마다 앞다투어 새로운 축제가 벌어지고 바닷가 주변엔 생기가 넘친다.


아직 친구도 없고 학교에 다니기 전인데 어떻게 축제 정보를 알 수 있을까 싶지만 여긴 아직 신문이 통하는 사회다. 거리별 요금을 부과하는 간단한 교통카드조차 없이 추억 돋는 'transit slip'을 북 찢어 주는 친절한 버스기사가 모는 버스를 타서 앞 쪽에 쌓여 있는 'Metro'신문을 하나 집어 들면 된다. 신상 맛집부터 축제 정보를 꼼꼼하게 읽으면 누가 얘기할 때 아는 척하기 쉬워진다. (덕분에 최근에 '몬트리올식 베이글'을 파는 가게를 알게 되어 나무 타는 냄새를 맡으며 양귀비 씨가 가득 묻은 베이글을 즐길 수 있었다.)


할리팩스에 도착하자마자 우리의 신분을 만들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비자를 들고 service Canada에 가서 주민등록증처럼 생긴 ID카드를 만들고 Scotiabank에서 계좌를 열고 Koodo에서 전화번호를 정했다. 캐나다는 어딜 가나 2개의 신분증을 요구하는데 주소가 표시된 신분증으로 달라고 한다. 그래서 계좌 열 때 말고는 여권이 별 소용이 없었다. ID카드와 운전면허증이 같이 있다면 좋겠지만 아직 면허를 바꾸기 전이라 ID카드와 SIN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공항 직원은 고용주 말고는 절대 SIN을 알려줘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이제 막 도착한 외국인이 SIN을 요구하는 통신사 직원의 말에 반박할 힘이 없었다. 크레딧 체크를 해야 한다는 그들의 말은 곧 체크를 많이 할수록 내 신용이 내려간다는 뜻과 같았다. 


집도 없고 영어 억양도 어색한 외국인 둘에게 페스티벌은 사람 구경하기 딱 좋은 기회였다. 할리팩스에 도착하자마자 시내 구경도 할겸 장을 보러 나가는 길에 여기저기 붙어있는 재즈 페스티벌 광고를 보니 신이 났다. 우리 커플이 데이트를 시작할 무렵에 갔던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의 낭만을 다시 경험해볼 수 있을까? 캠핑카에서 소시지를 구우며 나지막하게 들렸던 음악과 풀밭에 누워 별을 바라보며 느꼈던 첼로의 울림이 반짝 떠올랐다.


이들에게 재즈는 한국의 트로트였다.


내가 볼 때 한국의 뮤직 페스티벌은 대부분 20,30대 청년의 열정에 기댈 때가 많았다. 어딜 가나 또래들이 우르르 모여 다니고 '오늘 밤을 불태울 거야!'라는 의지에 가득 찬 그들의 깃발 아래 평소에 하지 못했던 행동을 분출할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이었다.


할리팩스의 재즈 페스티벌은 자라섬 보다는 '전국 노래자랑'의 분위기에 가까웠다. 흡사 교회 성가대를 떠올리게 하는 어르신들의 연주 실력도 대단했고 앞 쪽으로 나와 덩실덩실 춤을 추는 분들도 모두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었다. '재즈'는 괜찮고 '트로트'는 별로다 라던지 '왈츠'는 좋고 '막춤'은 싫다는 식의 무조건적인 부정이 아니라 하나의 음악 장르를 공유하는 층이 다르다는 점이 새로웠다. '재즈 = 젊음'이라는, 제한된 경험에서 얻은 상식이 깨졌던 순간이었다.


덕분에 축제라고 하면 항상 따라다니는 상업주의와 음식과 쓰레기의 공존이 잠시 비껴간 자리에서 다들 자유롭게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생수통에 'Tip'을 써붙이고 돌아다니는 자원봉사자를 피해 풀밭에 누워 한숨 잔다던지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재즈를 OST 삼아 게임을 하기도 했다. 차갑지만 습기를 머금은 바람을 맞으며 항구에 퍼지는 음악과 함께 내려앉는 노을을 바라보는 여유도 누릴 수 있었다. 


캐나다의 상징, 엉덩이 빠지는 의자. 한번 앉으면 일어나기 힘들다.


아마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여름 축제는 올해 30회를 맞은 'Halifax Pride'가 아닐까. 잘생긴 트뤼도 총리가 참가하는 것도 이슈지만 캐나다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행사로 지역 사람들의 자부심이 담겨있다. 이것 역시 다양한 지역단체들이 공들여 준비한 각종 자동차와 퍼포먼스가 가득하고 연령 구분 없는 모든 이들의 축제였다. 오히려 윗세대가 나서서 더욱 목소리를 낸다는 점이 신기했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아도 존재하는 인종차별, 성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대신 내주는 그들이 고마웠다.


핑크 티셔츠를 입은 사람이 트뤼도 총리다.


물론 반대 목소리도 크다. 하지만 각자의 의견을 존중하는 문화 덕분에 겉으로 드러나는 충돌은 없다. 그저 합법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이다. 나의 의견이 있다면 너의 의견도 있다. 쉽지만 지키기 어려운 이 질서로 인해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갈등이 안타깝다.


퍼레이드 직전에 뛰는 사람을 응원하고 각 단체가 준비한 행렬을 구경하기 딱 좋은 곳은 도서관 꼭대기였다. 머리가 타는 것 같이 뜨거운 낮 2시에 아스팔트 거리에 앉아 있기엔 아직 난 이곳에 적응이 덜 됐다. 대신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중앙도서관 꼭대기 소파에 앉아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걸로 충분했다. 최근에 지어진 이 도서관은 책도 많지만 공부하거나 작업하기 좋게 책상과 편한 의자가 많다. (커피도 맛있다.) 도쿄에 츠타야와 스타벅스가 있다면 할리팩스에는 도서관과 Pavia 커피가 있다.(!)



할리팩스 중앙도서관


Pride 축제를 지나 무지개 색으로 칠해 놓은 횡단보도에 사람이 뜸해지기 전에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드는 행사가 열린다. '2017 Tall ship festival'에 참가하기 위해 캐나다뿐 아니라 유럽과 미국의 유명한 범선이 이 항구에 모두 모여 매일 축제를 벌인다. Tall ship을 번역하면 범선 정도지만 눈으로 직접 범선을 볼 일이 없었던 나에겐 차라리 영화 '캐리비언 해적'에 나오는 배를 떠올리는 게 더 가깝다. 단지 전시용이 아닌 게 선원들이 타고 있고 계속 선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그들의 여행이 어디서 끝나는지 모르지만 우연히 어떤 상장을 주며 졸업생을 축하하는 작은 행사를 볼 수 있었다.


선원 모집중!


수고했어요. 짝짝짝


Tall ship은 낮에는 항구에 정착해서 여행객을 맞는다. ID카드만 있으면 내부에 들어가서 선원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볼 수 있다. 나는 줄이 너무 길어 들어가길 포기했다. 돛을 올리지 않은 배를 계속 보고 있자니 심심하기도 했다. 다행히 행사 마지막 날에는 Tall ship의 퍼레이드가 열렸다. 멋진 돛을 한껏 올린 배들이 축포를 터뜨리며 사람들의 환호에 답했다. 


초록색의 알렉산더 훔볼트2 호, 돛을 올린 사진이 맨 아래에 있다.
단연 이 지역의 명물 블루노즈2. 이 이름을 딴 레스토랑도 있다.
할리팩스 건너편 다트모스 항구에서
잘 마르는 빨래 같은 돛?
따가운 햇빛에도 모두 즐겁게 구경 중
역시 스페인 배!
페리를 타고 지나가다 인사를 하니 같이 손을 흔들어 준다.
작은 톨쉽부터 큰 톨쉽까지 줄지어 퍼레이드 중
저 뒤에 배는 왜 물을 뿜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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