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 처음 만드는 김치
주변을 살펴보면 여행 다닐 때마다 바득바득 한식을 안 찾아먹는 사람이 있는데, 나도 그랬다. 현지 음식이 아무리 맛있어도 매콤한 국물이 왜 안 당기냐만은 여행은 여행으로서 존중해야 한다는 쓸데없는 고집이 있었다. 매일 지겹도록 반복되는 일상이 아닌 공기마저 다른 새로운 여행지에서 특히 시큼한 김치는 안 어울렸다.
루앙프라방에 갔을 때 오랜만에 친구가 동행하는지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컵라면을 챙겨갔다. 하지만 태생이 의심될 정도로 향신료를 좋아하는 친구 덕에 매일 배부르게 현지 음식을 먹어서 이대로 여행이 끝나면 컵라면을 다시 싸들고 가야 했다. 배부른 배에 라면을 꾸역꾸역 넣었다. 아마 내 인생에서 먹은 라면 중에 가장 맛없는 라면을 먹은 밤이었던 거 같다. 당연히 다음 날 얼굴은 호빵처럼 부어올랐다.
캐나다에 올 때 짐을 싸면서 시골에서 정성스럽게 싸주신 고추장, 된장, 무말랭이를 하나도 가져오지 못했다. 생각보다 빨간 액체+고체는 무거웠고 고추장통을 빼야 23kg 제한을 간신히 맞출 수 있었기 때문에 미련 없이 뺐다. 입국 심사할 때 직원이 '음식 가져온 거 없냐'라고 물어서 자신 있게 'NO!'라고 대답했다. 뭐, 여행 다닐 때처럼 고추장 된장 안 넣고 음식 해 먹으면 되지.
하지만 그리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는 건 캐나다에 온 지 3주가 막 넘어갈 때 즈음 깨달았다. 김치나 매운 음식이 미친 듯이 먹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원래 난 매운걸 잘 못 먹는다. 체질 상 매운 걸 먹지 않아야 속이 아프지 않았고 회사에서 동료가 점심메뉴를 물으면 '안 매운 거면 다 좋아요.'라고 대답했다. 김치는 시골에서 보내준 그대로 쉬어버려서 겨우 김치찜을 된통 해 먹어야 모두 쓰레기통에 넣어야 하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었다.
문제는 입맛이 아니라 반찬이었다. 싸고 질 좋은 재료가 널려있어서 정신없이 주워 담아 요리를 해 먹기엔 하루 3끼는 사치였다. 서울에서 먹던 대로 늦은 아침, 빠른 저녁 2끼와 중간에 과일로 허기를 채우는 식으로 빨리 적응했지만 반찬이 문제였다. 샐러드를 연달아 먹으면 물리니 한 끼는 무조건 밥을 지었다. 빵을 먹어도 되지 않나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맛있고 건강한 빵을 찾기는 어려웠고 미국산 질 좋은 쌀이 훨씬 저렴했다. 토마토 계란볶음밥을 자주 먹고 야채보다 싼 소고기로 함박스테이크도 해 먹고 요리조리 고민을 하다 결국 항복 선언을 했다. '김치가 필요해!'
돌이켜보면 김치는 참 요리하기 좋은 재료다. 찌개와 볶음요리는 물론이고 주요 메뉴가 부실해도 김치가 옆에서 도와주면 그럭저럭 한 끼를 때울 만하다. 유통기한도 거의 없다시피 하니 많이 쟁여두어도 별 부담이 없다. (물론 냉장고에 장기 체류하는 게 큰 단점이기도 했지만.) 또 김치는 레시피도 엄청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큰 맘먹고 한 가지 요리를 하려고 하면 재료가 많이 남아 시들시들해지는 걸 보면 돈도 아깝고 시간도 아까운 경우가 많다. 요리를 공부했던 친구가 '사워크림을 한 통 사서 다 쓸 수 있으면 요리 잘하는 거야.'라고 했던 말이 두고두고 남아있다. 사워크림이든 김치든 대용량 한 통을 빠르게 쓰기 쉽지 않지만 그나마 김치는 낫다.
김치를 구하려면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한인마트에서 사거나 한국에서 택배로 보내달라고 하면 된다. 그런데 또 엉뚱한 도전의식이 솟아오른다.
현지 재료로 김치를 만들면 어떨까?
계기는 있었다. 파머스마켓에서 우연히 김치를 파는 걸 보고 다가갔는데 당연히 한국인이나 일본인 혹은 적어도 아시아 사람이 주인일 줄 알았지만 놀랍게도 영국 사람이 열심히 김치 홍보를 하고 있었다. 퓨전 김치도 아니고 새빨간 통김치가 투명한 병에 먹음직스럽게 담겨 나를 유혹했다.
맛을 보니 많이 익어 시큼한 맛이 훅 올라왔다. 고춧가루를 덜 넣고 아주 푹 익힌 것 같았다. 혀에 도는 알알한 맛은 적었지만 아쉬움을 달래기엔 적당한 김치 맛이었다. 한 병을 사면서 사장인 Jessi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니 한국에 잠깐 산 적 있고 그때 김치 담그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캐나다 사람들이 매운 걸 일반적으로 못 먹으니 고춧가루는 적게 넣었지만 자긴 매운 김치를 더 좋아한다며 아쉬워했다. 방금 지은 쌀밥에 김을 올리고 김치를 쭉 찢어 먹는 게 my favorite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너 진짜 코리안이구나'하면서 같이 깔깔 웃었다.
하지만 한국의 배, 고춧가루, 젓갈을 할리팩스에서 구하긴 쉽지 않다고 했다. 한인마트에서 사긴 하는데 한국사람들은 김치 맛을 보면 별로라고 하고 캐나다 사람들은 생소하다고 해서 걱정이 많단다. 그래서 나는 호기롭게 내가 만들어보겠다고 두 팔 걷어붙이고 마트에서 배추, 무, 파, 생강, 마늘 등을 사 왔다.
배추는 한 포기밖에 사지 않았지만 매우 통통해서 양은 충분했다. 속은 따로 담아두었다가 물김치 담글 때 썼다. 사과가 훨씬 맛있으니 서양배로 무리하기보단 사과로 단 맛을 맞추기로 했다. 고춧가루는? 당연히 없으니 칠리 페퍼와 파프리카를 반반씩 썼다.
밀가루풀을 만들고 재료를 모두 쫑쫑 썰어 믹서기에 넣고 갈았다.
나는 통배추김치보다 조금 쉬운 겉절이 방식으로 김치를 담갔다. 깍두기도 만들고 싶어 엄마에게 카톡으로 레시피를 알려달라고 하니 이렇게 답장이 왔다.
무우를 씻어 깍뚝 썰고
소주에 버무려야 하는데..
소주 없으면 소금 뿌려서
절이고 한 시간 정도.
양념은 풀물 끓이고
거기에 액젓, 고춧가루 (파프리카 대용), 마늘, 생강 간 것, 파 썰고
절인무우를 소쿠리에 건지고 소금물 버리지 말고
양념과 버무리면 되는데
간을 보고 싱거우면 아까 절이고 남은 소금물로 간을 맞춤
에이, 귀찮다. 겉절이+깍두기를 합쳐 버렸다. 액젓 대용인 피시소스가 마트에 없어서 뭘 넣을까 한참 고민하다 정체모를 생선 통조림을 사 왔는데 그냥 꽁치통조림 맛이었다.
버무려서 맛을 보니 무슨 맛인지 몰라 일단 발효의 힘을 믿기로 했다. 그리고 나를 힘들게 하는 고춧가루를 빼고 동치미 국물을 떠올리며 나박김치를 만들었다.
유리병에 넣어서 실온에 5일 정도 놓고 매일 맛을 봤다. 이게 대체 무슨 맛일까 싶은 의심이 점점 익숙한 맛으로 변해갔다. 과연 이 김치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