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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효선 Apr 17. 2022

가스라이팅

일반적이지 않다는 말을 비난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일반적이지 않다는 말이 그 사람이 잘못되었다 거나 문제가 있다는 의미로 쓴 게 아니다. 그냥 정말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은 다 다르고 주관적이기에 일반적이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일반적이지 않은 감정은 수용해줄 수 있지만 왜곡된 논리나 폭력적인 행동까지 받아줄 수는 없다. 나도 소중한 사람이고 스스로를 지켜야 하니까. 나이가 아주 어리다면, 못 배우고 미성숙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받아줄 수 있겠지만, 성인이라면 곤란하다.

요즘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가 자주 쓰이고 있다. 내가 혹시 가깝고 친밀한 사람들에게 가스 라이팅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자기를 점검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가스라이팅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는 상대에게 죄책감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상대방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부정적인 기분을 만든 장본인이 마치 상대방인 것처럼 만들고 상대의 말, 말투, 행동을 조종하려고 한다. 어떤 상대를 만나든, 어느 순간 그들이 자신을 대하는 말투가 모두 비슷하게 변해간다고 느낀다면 자신이 상대를 무의식 중에 조종하는 경향이 있진 않은 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까도 말했지만 감정을 느끼는 것은 자유다. 유전적 기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었던 경험, 인간관계, 자라온 양육태도 등으로 인해 한 사람의 인지구조가 어느 정도 형성된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기분 나쁠 만한 일이 아닌 데도 유독 어떤 사람에게는 기분이 나쁠 수 있다. 자기 성찰이 되는 사람은 냉정하게 자신이 예민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인정한다. 자존감이 낮을수록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그렇다고 상대방에게 문제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고, 자신에게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견딜 수 없으니 상대방 탓을 할 수밖에 없다. “내가 짜증 난 건 너 때문이야. 네가 그런 말을 해서 내 기분이 상했어. 그러니까 다시는 내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마.”라며 상대의 말이나 행동을 조종한다. 좀 성숙한 사람이라면 누가 들어도 아무 문제없는 무난한 상대방의 말에 짜증이 나는 자신의 감정을 인지하고,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다독일 것이다.

반복적인 가스라이팅을 당한 사람은 대게 자신의 말에 정말 문제가 있는 것인지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고 자기가 누군가를 괴롭게 했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느끼며 사과를 한다. 그는 뭔가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가스라이팅하는 사람을 눈치 보며 그 사람 입맛대로 움직이게 된다. 무엇을 해도 결국 자신이 잘못한 되어버리는 상황이 반복되면 자존감은 낮아지고 무기력해진다.

모든 사람의 방어기제는 살아남기 위해 형성되었다. 그래서 나는 나르시시스트들도 안타깝게 생각한다. 아마 그것이 그의 삶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식이었을 것이다.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 있었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런 환경과 가르침을 제공하지 못한 그의 부모에게 탓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모도 그들의 부모에게서 그런 환경과 가르침을 받지 못했을 것이기에, 그의 부모에게도 잘못이 없다. 이렇게 가면 끝이 없다.

이를 인지하고 깨닫고 고치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자식이 있다면 다음 세대에게는 같은 고통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진정으로 한다면, 뼈를 깎는 노력으로 고칠 수도 있다.

사실 나르시시스트들은 매우 약한 사람들이다. 자기 자신과 삶을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사람들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으로는 도무지 사랑받을 수 없을 것 같으니 조종을 해서라도, 자신을 꾸미고 속여서라도 그 사람을 곁에 두고 싶은 것이다. 자신이 부족하고 잘못된 사람이라는 것이 들통나면 떠날 것이 분명하기에. 그 상태가 심각해질수록 무서운 것은 자신이 꾸민 이상적인 자기 모습을 실제로 믿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상대를 조종하는 것에 죄책감이 사라지고 그 횡포는 점점 더 무자비해진다.

상대가 주는 사랑을 온전히 느낄 수가 없고, 누군가를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누구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의식 중에 자신의 진짜 모습은 너무나 부적절하고 부도덕하고 끔찍하므로,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절대적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사랑을 받고 있어도 진실로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진짜 자신의 모습은 너무 더럽고 추해서 절대로 사랑받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상대의 사랑이 진짜라 해도 그것은 자신의 꾸며진 모습을 사랑한다고 믿기 때문에 충족감을 오롯이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랑을 할 때는 버림받지 않기 위해 사랑을 퍼 주기 때문에 그것은 진짜 사랑이 아니다. 상대방의 진솔한 마음에 초점이 가 있지 않고 늘 자기 자신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상대가 날 어떻게 대우하는지, 어떻게 바라보는지, 자기가 어떻게 보이는지에 신경 쓰느라 타인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다. 사실 이것은 매우 슬픈 이야기이다. 마녀의 저주에 걸린 것이다.  

나는 이 저주를 풀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일관되고 변하지 않는 사랑을 받아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굉장한 인내심이 필요한 작업이다. 정말 운이 좋아서 그런 사람을 만나면 좋겠지만 그런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상담을 받는 것을 추천하는 것이다. 상담을 통해 새로운 인간관계를 경험하면서 인간에 대한 신뢰를 쌓고,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사랑받을 만하다고 진정으로 믿게 된다면 저주에서 풀려난 것이다.

나는 요즘 어린 시절 제대로 된 관심을 받지 못하고 방치되고 학대받으며 자란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여러 가지 부모 유형이 있지만 아무리 건강하지 못한 부모라 해도 어떤 식으로든 사랑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랑조차 받아본 적 없는, 정말 무관심의 상태에서 자란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 마음속에 살아갈 힘이 없다. 그들은 높은 확률로 병에 걸려 일찍 죽거나 정신병에 걸리거나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되는 것 같다. 발달 과정에서 마땅히 충족되었어야 할 보살핌, 그로 인해 형성되는 자아상(자기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가치, 신뢰 등… 그들은 받지 못했고 교육받지 못했기에 무법자가 된다.

어린아이들도 다 안다. 자기를 정말 사랑으로 대하는지, 의무적으로 대하는지. 자기에게 관심을 갖는지, 귀찮아하는지. 자기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갖은 방법을 동원한다. 그 생존 방식이 성인이 되어 죽을 때까지 반복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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