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난 사람
‘원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꼭 좋은 건 아니구나’ 깨닫고 있는 요즘이다. 언제나 그다음이 문제다. 그걸 어떻게 나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처리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다면 그 일이 일어난 게 무슨 소용인가. 오히려 아쉬움만 남길뿐이다.
그럼에도 언제나 진심타령이다. 진심이면 됐다고. 그게 그런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나. 그게 사랑인지 아닌지. 진심인지 아닌지. 뭔가 당연히 다른 게 섞여 있겠지. 순수한 사랑이니 진심이니 그런 게 있을까.
마음이 아프다. 이건 온전히 내 몫이다. 아파야 하니 아플 수밖에. 예정되어 있던 일이다. 아플 걸 모르지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픔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미리 아는 것은 고통을 줄이는 데에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고 그 고통이 시작을 막을 수도 없다. 사람들은 그런 걸 보고 미련하다고 한다. 나는 어리석은 인간이기에 아플 걸 알면서도 시작하고 기어이 아파서 끙끙 앓는다. 내가 이런 사람이니 어쩔 수 없지.
제발 내가 나에게 좀 관대했으면. 우울하기만 한 내가 아닌데. 나도 웃음이 많고 웃을 때 예쁜 사람인데. 매일같이 혼이 나기만 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아닌데. 자꾸 숨고 싶고 감추고 싶고 땅굴 파고 들어가려고 한다.
다 욕심이었던 걸까. 내가 욕심부려서 벌 받는 건가. 어떤 한계에 마주한 느낌이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 한계라는 것도 내가 지어낸 것이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다. 애매한 사람. 양심도, 선도, 사랑도 애매해서. 결국 이 지경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나를 나무라거나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싶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후회할 짓이라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뭐라도 하면 뭐든 변한다. 행동에 따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게 안 좋은 결과라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안 해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무언가를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고 어리석은 일이라도 했다는 것은 용기를 낸 것이다.
이 시점에서 남 탓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분명 자신이 한 일인데도 남 탓을 하는 것이다. 아주 비겁한 사람이다. 내가 벌인 일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 한다. 그것 만큼은 하려고 태어난 것이다. 기껏 용기 내어 행동해 놓고-그 행동이 엉터리 같은 짓이라 해도-끝까지 남 탓을 하며 버티는 것은 정말 한심하고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부정하는 일이다.
행복해지고 싶다고 우는 것은 처량하다. 그러나 난 어제도 그랬다. 정확히 어젯밤에 행복해지고 싶다고 울었다. 아마 호르몬 때문일 것이다. 오늘은 괜찮다. 행복하든 말든 그런 것 따위는 별로 신경이 안 쓰인다.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불행한 사람도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불행한 사람을 담당한 것이다.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면 언제라도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행복한 역할도 맡을 수 있겠지. 그땐 그 역할에 충실해야지. 물론 지금도 충실해야 할 것이다.
나이 들수록 무뎌지는 게 좋다. 예민하고 너무 아픈 것은 싫다. 무슨 일이든 그러려니 하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너무 재미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세월 속에 단단해진 것일 테다. 너무 많이 겪어와서, 너무 많이 힘들어서. 아마 아파도 참는 것일 테다. 참을성이 늘어서. 많이 아파와서. 한 번 겪은 아픔이라고 해서 다음에 덜 아픈 것은 아니지만 맷집이 생겼다고 해야 하나. 아는 아픔은 모르는 아픔보다 참을 만한 것이다. 뭐든 자주 보면 익숙해지는 것처럼.
사랑받고 싶다. 그건 받아도, 받아도 익숙해지지 않을 수 있을 텐데. 그래 놓고 어떻게 될지는 또 모르지만,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