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미 사회의 부품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글을 전개하기에 앞서,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순수가 지속되길 바랍니다. 나이가 들수록 순수를 간직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종종 상처받고 분노하고 아파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 속에서도 결코 순수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순수는 우리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개미 한 마리를 보았을 때도 눈을 반짝였고 하늘의 달과 별을 올려다보며 경이로움을 느꼈습니다. 그 사람과 처음 만날 때는 서툴렀지만 진실했고 도전을 할 때는 무섭지만 앞으로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우리는 이 감정과 이 느낌을 소중하게 간직해야 합니다. 삶은 절대 이성(Reason)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성은 단지 건물의 골조일 뿐입니다. 호기심과 모험심이 이 골조를 건물로 만들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삶의 어느 순간부터 호기심과 모험심을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또 순수함도 잃어버립니다. 그 어떤 것도 경이롭지 않고 그 어떤 것도 내 마음을 뛰게 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냥’ 삽니다. 나는 말 그대로 죽지 않았기 때문에 삽니다. 이는 여러분의 잘못만은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호기심을 말살합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돈을 줍니다.
자본주의란 무엇인가요? 자본주의란 곧 자아의 포기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우리는 자아를 포기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이 요리를 한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순수하게 맛있는 라면을 끓이고 싶은 마음으로 부엌에 갑니다. 이때는 라면 끓이는 행위도 하나의 예술입니다. 여러분은 라면을 끓이며 재미와 기쁨을 느낍니다. 여러분은 라면 끓이는 행위로부터 "소외"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돈을 벌기 위해 라면을 끓이는 순간, 라면 끓이는 일은 이제 따분하고 재미없어집니다. 여러분은 언젠가부터 기계적으로 라면을 끓이게 됩니다. 이렇게 노동과 노동자가 분리되는 현상을 "노동 소외"라고 합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 소외는 필수입니다. 왜일까요?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요?
우리는 역사를 고대-중세-근대-현대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근대를 이성의 시대, 과학의 시대, 산업혁명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다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근대의 이성은 고대 그리스의 이성과 다릅니다. 즉,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이성과 데카르트와 뉴턴이 말하는 이성은 아예 다른 겁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이성(Reason)을 말할 때, 우리가 말하는 '이성'은 데카르트와 뉴턴의 이성을 말하는 겁니다. 이걸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이것만 알아도 여러분은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를 하나 얻은 겁니다.
근대의 이성은 세계의 운동법칙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즉, 함수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근대의 이성입니다. 물류센터를 예로 들겠습니다. 물류센터를 운영하는 사람은 묻습니다. “오늘 물량을 맞추기 위해서는 노동자 몇 명이 필요할까?” 이때 이 물음이 바로 운동법칙을 찾아내려는 시도입니다. 물량과 노동자 수의 관계를 찾아내는 능력, 이게 바로 근대의 이성입니다. 그리고 이 물음은 근본적으로 “사과는 왜 땅으로 떨어질까?”라는 질문과 똑같습니다.
이 세계는 운동법칙으로 이루어져 있고 인간 이성은 이 운동법칙을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집니다. 이게 바로 근대의 이성입니다. 물리학과 경제학에서 사용하는 모든 수식은 바로 이 운동법칙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인간과 돌멩이가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 역시 운동법칙에 종속되어 있을 뿐입니다. 물류센터를 운영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건 (노동자에겐 안타까울 수도 있지만) 노동자 개개인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최소한의 노동력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달성할 수 있는 법칙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류센터를 운영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인간은 자동차에 투입되는 기름과 똑같은 겁니다. 이게 바로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제 어떤 방법으로 운동법칙을 알아내려 할까요? 여러 방법이 있지만 그 근본은 미적분입니다. 자본주의 작동방식을 알기 위해서는 미적분이 필수 중 필수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하나의 부품으로 전락합니다. 자신이 부품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가난으로 그 사람에게 복수합니다. 여러분, 인간은 우선 동물입니다. 물질적 충족 없이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의식적이든, 의식적이지 않든 자본주의에 복종합니다. 그리고 이건 잘하는 일입니다. 우선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부품이 된 인간에게 자본주의는 또 다른 요구를 합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너의 가능성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여러분, 혹시 야구 좋아하시나요? 프로 야구 선수는 우선 자신이 야구라는 게임의 부품이자 일부임을 인정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프로 야구 선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야구 선수는 또 하나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바로 타자를 할지 투수를 할지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뛰어난 야구선수는 어릴 때 투수와 타자 모두를 합니다. 그것도 다 잘합니다. 이 사람은 야구를 사랑하여 공을 치고도 싶고 던지고도 싶습니다. 하지만 프로야구선수가 되면 결국 하나만 선택해야 합니다(오타니는 정말 극단적인 경우입니다). 투수와 타자를 모두 다 하면서 뛰어난 프로야구 선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자본주의는 이렇게 인간에게 너의 다른 가능성을 다 버리고 하나에만 집중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분업입니다. 자본주의는 효율성을 위해 인간에게 전체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라 명령합니다. 아무리 야구 그 자체를 사랑하고, 야구 전체를 알고 싶다고 하더라도 프로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결국 야구의 일부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세계의 부품으로 전락하는 것을 넘어 세계의 파편으로 전락합니다. 삶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는 인간에게 자본주의는 가난으로 복수합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인간은 모험심과 호기심을 잃어가고 무생물화 되어 갑니다. 자본주의가 인간을 무기물로 대하니 인간도 자기 자신을 무기물이라 여기게 되는 겁니다.
지금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입니다. 여러분, 저는 자본주의를 저주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주었습니다. 저는 지금 단지 자본주의의 작동 양식과 자본주의 아래에서 인간 정신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부디 다른 오해는 없으시길...)
(브런치에는 없는, 경제 경영과 관련된 저의 더 많은 글들을 보고 싶으시다면, 아래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https://studiocroissant.com/my-philosophy-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