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들 Jan 28. 2020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른 건 맞는데요

제 말을 오해하셨어요. 오해가 아니라면 당신은 그저 내가 싫은 것일 뿐.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른 건데, 좀 좋게 말하면 안 돼?”



나도 많이 쓰고, 사람들도 자주 쓰는 말이다. 같은 말이라도 에둘러 말하고, 표현을 순화하면 듣는 사람의 기분이 덜 나쁠 테니 조심해서 말하라는 의미에서 관용구처럼 사용하는 말이다. 일상에서 쉽게,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자주 쓰는 이 표현이 글을 쓰는 요즘,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우리는 이 문장을 늘 말 ‘하는’ 사람에게만 강요할 뿐, 말 ‘듣는’ 사람들은 왜 자신들은 이 문장과 일견 상관없는 사람인 것처럼 구는 걸까?


아무리 정화해서 말해도 말이 내 의도와는 다르게 전달될 때가 있다. 물론 이런 경우에는 조금 더 높고 또 비교적 확실한 확률로 말 하는 사람의 표현의 미숙함에서부터 오해가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말을 듣는 사람의 배배 꼬인 태도와 예민함에서부터 말로 인한 갈등이 빚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는 아주 전형적으로 그 사람의 말에 담긴 의도보다는 표현 그 자체만 놓고 꼬투리를 잡는 경우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이런 사람을 극도로 싫어한다.




한때 알고 지냈던 동생이 있다. 단체 모임에서 우연히 알게 된 우리 둘은 모임 외에도 따로 만날 정도로 급속하게 친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본인이 스토킹을 당했는데, 상담할 게 있다며 울먹이며 전화를 한 것이다.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음에도 동생의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어 15분 여 동안 통화를 하며 이야기를 들어줬다. 한창 이야기를 하던 동생은 이내 말을 마무리 지었고, 쭉 듣고 있던 나는 “어머, 무슨 그런 일이 있대? 얼마나 놀라고 힘들었을까… 얼굴이 예뻐서 이런 이상한 일도 당하고… 고생이 많네.”라고 진심을 담아 말을 꺼냈다. 이후 동생과 나는 5분 정도 더 통화하다가 “잘 마무리 됐으면 좋겠다, 진짜로. 내가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해. 밤이라도 괜찮아.”라는 나의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날 저녁에 발생했다. 저녁 먹을 시간 즈음에 다시 걸려온 동생의 전화를 황급히 받았고, 낮에 통화할 때와는 다르게 날 질책하는 톤의 화가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낮에 통화할 때 말이야. 어떻게 그렇게 말 할 수 있어? 언니 말에 따르면 내가 스토킹 당한 게 ‘내 얼굴이 예뻐서’라는 거야? 내 잘못이라는 거야?”


휴…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럼에도 상대가 기분 나빠할 만한 ‘여지’를 줬다는 점에서는 내 잘못도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 자리에서 바로 동생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말 뒤에 감춰진 의미를 하나 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말하고 사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면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는 게 낫다고 생각될 때가 많다... (출처: 펭수)


“내 말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해. 하지만 나는 정말로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었어. 아까 전화 받고 일단 걱정 됐고, 너의 그 무서움에 공감했기 때문에 많은 위로와 공감을 표현했어, 나름대로. 그리고 ‘얼굴이 예뻐서 이런 일도 당하고’라고 했던 것에 대해선 내 표현이 적절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사과 할게. 진심이야. 하지만 널 질타하거나 네 잘못이라고 하기 위해서 그런 말을 꺼낸 건 아니었어. 어떻게 내가 알지도 못하는 스토커 편을 들 수 있겠어? 난 그저… 보통 모르는 사람이 스토킹을 한다면 외적인 것에서부터 호기심이 발동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처음 본 사람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스토킹을 하겠어. 이유는 보통 외모잖아. 그래서 난 외적인 것이 그 스토커의 스토킹 동기가 되었을 거라는 점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표한 것이지, 널 질타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어.”


동생은 나의 변명 아닌 변명에 어느 정도 수긍하는 듯 했지만 여전히 찝찝한 목소리였다. 그렇게 수 번을 사과하고서야 전화는 끊어졌고, 동생과 나는 다시는 단 둘이서 만나지 않게 되었다.




지나간 이야기를 통해 내 잘못을 변호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런 마음이 있었다면 애초에 글을 써서 많은 사람들이 널리 읽을 수 있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잘못한 점이 있고, 그것에 대해 상대방이 사과를 받고 싶다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사과할 수 있고 그럴 마음도 있다. 하지만 내가 동생에게 서운함을 느꼈고, 마음 상했던 것은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하소연을 다 들어주고 위로와 공감을 표했던 친한 언니의 걱정 어린 마음보다도 ‘네 얼굴이 예뻐서’라는 몇 단어에만 꽂혀서 상대방의 마음을 왜곡해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소위 말해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어?’ 마인드가 발동한 것이다.


말을 할 때 ‘아’ 다르고 ‘어’ 다르기 때문에 같은 말이라도 좋게 해야 한다는 것에 십분 공감한다. 그래서 말을 할 때, 속에 있는 솔직한 말이 튀어나왔을 때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기분 나빠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그냥 입을 다무는 편을 택한다. 불현듯 떠오르는 머릿속 생각과 마음속 이야기까지는 컨트롤 할 수 없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 상황을 불편하게 만들지 말지는 온전히 내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나는 괜찮다고 생각해서 했던 말과 표현의 미숙함 때문에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혹은 찝찝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그게 설사 내 의도와 전혀 다르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라도 말을 한 사람이 평소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와 어떤 관계에 있던 사람이었는지를 한 번 더 떠올려 본다면, 설사 상대방이 한, 두 번 서운한 표현을 했다고 해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언젠가 2년 만에 친한 선배를 만난 적 있다. 만나서 인사를 하며 반갑게 안부를 주고 받던 중, 선배는 내게 “살이 올라서 얼굴 좋아 보인다~ 예전에는 너무 말라서 힘들어 보였는데…”라고 말했다. 내가 만약 예민하고 꼬인 마음으로 선배의 말을 받아들였다면, 그 자리에서 기분 나쁜 티를 내면서 “선배 지금 저더러 살 쪘다고 말씀하시는 거 맞죠? 외모 평가 하는 거예요? 어떻게 만나자마자 면전에서 그런 말을 하실 수 있어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선배가 그런 의미로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선배는 너무나도 선하고 다정다감하고 타인에게 친절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예전엔 예민하고 버거워 보였는데, 살이 좀 찌면서 인상이 좋아졌다는 얘기를 저렇게 하신 거구나.’라고 받아들이고 기분 나쁘지 않게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선배가 평소에 꼰대짓을 일삼고 주변 사람들에게 못된 말로 가시를 박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선배의 말을 표현 그대로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고는 기분이 나쁘다고 말했을 것이다.


이처럼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표현은 말 ‘하는’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지만, 말 ‘듣는’ 혹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표현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을 수 있고, 때에 따라 경우에 따라 다양하게 쓰일 수 있는 만큼 받아들이는 사람도 융통성 있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처럼 말 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말 듣는 사람도 다같이 조심할 때, 우리 모두 서로에 대한 ‘말의 예의’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푸들 with 스튜디오 크로아상
매거진의 이전글 무뚝뚝한데, 뭐 보태준 것 있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