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바라기는 그렇게 변해가고 성숙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어렵사리 대학원에 입학했던 때였다. 주변에선 어려운 집안 형편과 엄마의 힘듦을 생각하라며 하나같이 똑같은 말로 대학원 진학을 말렸다. 그럼에도 ‘내 분수는 내가 정하고, 내가 만들어 나갈 거야!’라는 포부와 함께 대학원 문턱을 넘었다. 당시 엄마는 10년 가까이 하고 있던 식당 일에 온몸이 가루가 되어 먼지처럼 날아가버려도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정도였고, 아빠 또한 일생을 바쳤던 가게를 접고 이런 저런 일들을 하다가 작은 급식 유통 업체 배달 사원으로 취직하신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어려운 경제 상황 덕에 동생은 더 높은 비율의 타의와 약간의 자의로 계획보다 빠르게 군대에 입대했다. 많지 않은 숫자였지만, 가족 구성원 모두 제각기 처한 상황은 최악이었다. 엄마가 자주 쓰는 말처럼 ‘팔자에도 없는’ 자식 공부 뒷바라지를 최소 2년이나 더 하게 생겼음에도, 남들은 나를 이기적이라고 비난할지언정 부모님과 동생 만큼은 나의 결정을 지지해주었다.
그렇게 모두의 쉽지 않은 결정으로 대학원에 입학한 후, 단 돈 1원 한 푼이라도 학업 때문에 집에 손 벌리는 일은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조교 업무를 비롯한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할 수 있는 일은 모조리 다 했다. 그럼에도 취업이 급하지 않고 공부가 더 하고 싶다는 ‘있어보이는’ 이유로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열등감이 넘쳐 흘렀다. 그들이 여유 있고 나보다 상황이 더 좋은 것이 그들의 잘못과 탓이 아님에도 비뚤어진 열등감은 그 화살을 ‘사람’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화살은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 다르다는 말처럼, 막상 힘든 상황에 내몰리게 되자 내 결정을 어렵사리 지지해준 가족들에게까지 뻗어나가고야 말았다.
사건의 발단은 아빠가 몰고 다니는 탑차에서부터 시작됐다. 아빠는 쉰이 넘은 나이에 집 근처에 생긴 작은 급식 유통 업체의 배달 사원으로 새롭게 취직하셨다. 밤낮 없이 고객사가 원하는 배달 시간에 맞춰 서울과 경기, 인천까지 넘나들며 하루에도 10시간 넘게 운전을 하셨다. 이제 더이상 엄마 혼자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과 더불어 아빠가 드디어 월급 따박따박 나오는 회사에 취직했다는 사실에 들떴고 또 기뻤다. 하지만 들뜬 기분도 잠시, 다니던 대학원의 기숙사 근처에 배달을 왔다가 나를 만나러 온 아빠가 탑차를 몰고 와 차창을 내리며 “딸!”하고 크게 불렀을 때, 나는 누가 날 알아볼까봐 아닌 척 하며 고개를 숙였고 이내 얼굴을 붉혔다.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빠의 탑차에 마지못해 올라탔고, 아빠는 퉁명스러운 딸의 태도에 “아빠가 탑차 타고 온 게 부끄러워?”라며 물었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뜨끔했고 “그런 거 아닌데?”라며 괜히 더 심통을 부렸다. 아빠가 생각해서 사준 호빵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내내 저기압으로 뾰루퉁하게 앉아있었고, 아빠는 그런 내 눈치를 보셨다. 하나가 이뤄지면 아무것도 없던 시절은 생각지 못하고 이내 둘을 바라게 된다고, 이전에는 아빠의 취업만을 간절히 원했으면서도 막상 취업이 되니 남에게 내세우기에 번듯한 직장을 바라게 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사귀고 있던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학벌도 집안도 나보다 훨씬 좋았다.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다행인지 아닌지, 그는 내 개인적인 상황과 집안의 경제적 여건을 묻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덕분에 만나는 기간 동안은 그 앞에서 내 사정을 어렵게 말해가며 소위 ‘궁상 떨 일’은 없었다. 어쩌면 그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제대로 쉬는 날 하루 없이 평일이면 수업 듣고 주말이면 일하는 나를 보고 어느 정도는 짐작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자존심 상하게 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일부러 묻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태도와 그로부터 비롯된 배려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넉넉하게 용돈을 받으며 여유롭게 취업 준비를 해서 한 번에 대기업에 합격하고, 어려운 관문을 쉽게 통과한 것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길 수 있는 그의 태도가 놀랍고 또 부러웠다. 그와 대화를 나눌 때면, 대학생 때 친구들과 단체로 유럽 배낭여행을 갔던 이야기며 부모님으로부터 몇 백 이상 하는 명품 손목 시계를 취업 선물로 받았다는 이야기 등 격차가 느껴지는 이야기들로 인해 혼자 몰래 주눅 들 때가 많았다. 그가 눈치를 주거나 나를 기죽이기 위해 그런 말들을 자랑 삼아 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그에게는 일상적인 일의 일부였음을 잘 알았기 때문에 더욱 괴로웠다. 그렇게 1년 남짓 만나면서 점점 구겨져가는 초라한 나와 점차 승승장구 하면서 평탄한 아스팔트 길을 유유자적 걷고 있는 그의 격차가 단순히 노력만으로 좁혀질 수 있는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무렵, 그에게 이별을 고했다. 그리고 사랑 뿐만 아니라 어떠한 감정을 온전히 느끼고 누릴 수 있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괴로워 앓았던 때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떳떳하게 말할 수 있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라고. 하지만 지금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현재의 객관적인 상황이 당시 최악의 상황이었을 때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졌기 때문이다. 그 상황 안에 있었을 때 ‘가난은 죄가 아니예요. 그래서 난 탑차 운전하는 아빠가 부끄럽지 않아요’라고 말했다면 용기 있는 외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 상황을 벗어난 지금에서야 들릴 듯 말 듯 자그마한 목소리로 웅얼대며 말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비겁하고 용기가 없다.
지금도 여전히 찢어지게 가난하고 열등감에 찌들어 있으며, 불만과 불안을 등에 업고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면 난 여전히 아빠가 운전하는 탑차에 선뜻 흔쾌한 마음으로 탈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생각하기에 달려있다고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이 생각과 마음을 장악하고 그로부터 태도와 행동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말해본다. 가족을 위해 자존심 강한 아빠가 인생 2막에서 새롭게 취업을 결정했고, 그로 인해 아주 잠깐이나마 숨통이 트였던 그 시절과 그때의 아빠에게 감사한다고. 동시에 아빠의 노동에 나의 선입견을 더해 아빠의 탑차를 부끄러워 했던 것을 깊이 후회한다. 하지만 당시의 부끄러움을 후회해서 잘못을 빈다고 해도, 앞으로도 살면서 그때 그 순간처럼 때로는 아빠를 미워하기도, 때로는 부끄러워하고 또 때로는 사랑하고 존경하며 살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또 이런 자식의 부족함과 못남까지 보듬어 안아주는 것이 부모님의 사랑임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내게 있어 남은 날들 중 부모님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날보다 사랑하고 기억하는 날이 더 많아지기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