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 사랑해요. 안녕히 주무세요.”
10살 무렵까지 나와 남동생이 자기 전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는 일이 있었다. 바로 ‘10시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이제 티비 그만 보고 들어가서 자야지.”라는 엄마의 말이 들려오면 여름엔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겨울엔 내복 바람으로 엄마, 아빠에게 달려가 볼에 뽀뽀하며 껴안고 “엄마 아빠 사랑해요.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엄마, 아빠도 우리를 꼬옥 안아주시며 잘자라고 해주셨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침대에 아이들이 누워 있고, 잠자리를 봐주러 온 부모가 동화책을 읽어주거나 자식의 볼, 뺨에 뽀뽀를 하며 “사랑하는 우리 아들(혹은 딸), 잘자렴.”이라는 대사와 함께 훈훈한 모습이 비춰지던데, 우리 집은 정반대였다. 엄마, 아빠에게 자기 전 치르는 의식들을 행하고 난 뒤에는 방으로 달려가 알아서 불 끄고 이불 덮고 누워 잠들었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특이한, 우리 집만의 가풍 아닌 가풍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도대체 엄마, 아빠는 언제부터 우리에게 이런 특이한 습관이 생기도록 가르치신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이 모습은 생애 가장 첫 번째 순간을 떠올리면 늘상 쉽게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오래 된 기억이다. 그만큼 머릿속에 진하게 남겨진 추억 속 모습은, 자식에게 그대로 물려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습관은 도대체 언제부터 사라지게 된 걸까? 꼬물거리던 작은 것들은 왜 크나큰 품을 벗어나기 시작한 걸까?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엄마를 조르고 졸라 처음으로 나만의 방을 가지게 되었다. 문을 꼭 닫아두고 있다가 내킬 때만 활짝 열어둘 수 있는 그런 방을 원했다. 친구들은 모두 ‘내 방’이라고 부를 것이 있는데, 그때까지도 나는 남동생과 한 방을 썼다. 큰 방에 제각기 벽면을 향해 책상을 두고, 이층 침대 1층에선 동생이, 2층에선 내가 자는 그런 모양새로 지내왔다. 하지만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늘어난 사춘기 소녀는 남동생과 함께 방을 쓰고 잠을 자는 게 제 나이에는 이제는 일반적인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문득 ‘내 방’ 하나 없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그렇게 며칠 동안 떼를 써 어렵사리 얻어낸 작은 방에서 통통 뛰면 푹 꺼지지 않는 새 침대와 함께 하는 날들이 즐거웠다. 그리고 제 방이 생기면서 점차 ‘혼자’에 익숙해지던 소녀는 이제 자연스럽게 자기 전 매일 치르던 의식을 행하지 않게 되었다. 엄마, 아빠와 뽀뽀하고 매일 귓전에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게 다른 친구들에게는 없는 일임을 알게 되자, 이내 “안녕히 주무세요!”만 던지듯 외치고 방으로 쪼르르 달려가 문을 쾅 닫아버리는 게 일상이 되었다. 이런 모습을 본 동생도 얼떨결에 누나를 따라 매일의 의식을 행하지 않게 되었고, 부모님도 처음에는 아쉬워 하시는 듯 했으나 차츰 변화를 받아들이셨다.
현재와 비교적 가까운 과거를 회상할 때면, 부모님에 대한 원망과 아쉬움, 부족함, 불만과 불평 등 부정적인 감정만이 상념의 그릇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먼 추억은 시간의 희석 덕분인지 지금의 메마른 현실 탓인지 가장 깊은 곳에 있으면서도 자주 수면 위로 떠올라 내내 따뜻함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일까, 더 나아질 인생을 꿈꾸며 포부로 가득 했던 젊었던 나의 부모가 우리에게 일상처럼 해주었던 모든 것들이 결코 평범하지 않은, 절로 얻어지는 것들이 아님을 알게 되니 이 유산을 어떻게든 온 몸으로 기억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다짐한다. 한겨울, 아직 데워지지 않은 전기장판의 온도가 오르기 전, 차가운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리며… 쉽게 주어지지 않았던 것들에 감사함을 느끼면서 나의 부모가 퍼주었던 사랑의 표현과 그 무게를 먼 훗날 만나게 될 나의 사랑하는 누군가들에게도 꼭 같은 모양새로 전해주리라고. 그래야만 나의 부모가 먼 여행길을 떠난 후에도 그 소박한 사랑의 유산은 주위에 남아 나와 우릴 따뜻하게 감싸 안고 그 자취를 잊지 않게 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