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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들 Feb 21. 2020

타인에게 흔쾌히 어깨를 빌려주는 삶

영혼을 풍만하게 어루만져 주는 그 태도

중, 고등학교 시절을 모두 합쳐 6년을 꼬박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결코 가깝지 않은 거리를 매일 버스 타고 다니려니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게 가장 문제였다. 중학교 때는 좋아하는 책을 읽느라, 영화를 보느라 혹은 한창 빠져있던 게임을 하느라 새벽 2시를 넘겨 잠에 드는 날이 많았다. 그렇게 모자란 잠으로 하루를 보내야 하는 날이면, 집에 돌아가는 길이 참 고역이었다. 높은 파도처럼 크게 몰려오는 잠을 이겨내지 못하고 창문에 머리를 콩콩 찧어가며 꾸벅꾸벅 졸아댔곤 했으니까 말이다.


버스 앞쪽에 혼자 앉는 자리나 뒤쪽에 위치한 두 명이 함께 앉는 자리라고 해도 창가 쪽 자리라면 사정은 그나마 낫다. 창가에 머리를 잔뜩 기대어 버리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도 쪽 자리나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야 할 때면 꼭 곤란한 일이 생기곤 했다. 바로 갈 길을 잃고 사경을 헤매는 머리통이 다른 사람의 어깻죽지에 가 닿을 때다. 그럴 때면 이쪽도 그쪽도 서로 난감했다. 상대가 남자이거나 같은 학생인 경우에는 슬쩍 어깨를 빼거나 어깨를 위로 들썩대면서 불편감을 표시하곤 했다. 그리고 이런 경우가 대부분의 극히 평범하고도 일반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에 가는 늦은 밤 시간, 버스 옆자리에 앉아 계셨던 아주머니의 따뜻한 어루만짐은 내게 사람으로서 서로 주고 받는 정과 도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했다.




대학교 4학년 마지막 학기, 능력은 고려하지 않고 참 어거지로 이 일, 저 일 많이도 펼쳐 놓았었다. 마지막 학기라 그간 채우지 못한 학점을 꽉꽉 채워서 하루 6시간 넘게 수업을 듣고 난 후에 6시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고 막차를 타고 집에 가는 게 일상이었다. 이렇게 평일을 보내면 주말에 또 다른 아르바이트를 했고, 쉬는 날은 커녕 집에 들어가 씻고 4시간 정도 새우잠을 겨우 청한 후 다시 일어나 새벽 별 아래에서 손을 호호 불어가며 집을 나서는 날이 잦았다. 이런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일하면서 서 있을 때도 발을 놀리지 않고 가만히 서 있으면 3초도 채 되지 않아 서서 눈을 감고 자다 쓰러질 뻔 하는 일이 비일비재였다.


이렇게 극한의 상황으로 치닫는 생활을 이어가던 중, 어김없이 마감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뛰어서 막차에 올라탄 날이었다. 숨을 고르며 자리가 있는지 눈을 굴리던 중, 한 아주머니 옆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성큼성큼 걸어가서 백팩을 몸 앞쪽으로 당겨 안고 자리에 앉았다. 창가 자리가 아니라 불안하긴 했지만, 추운 날씨에 살짝 뛰었던 지라 잠이 깼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그런데, 겨울이라 히터를 빵빵 틀어놓은 버스 안의 따뜻한 공기와 등받이에 녹듯이 기대어 버린 몸뚱이 덕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다. 그러던 중 ‘헉, 어디지?’ 하는 생각과 함께 눈을 뜨니 어느새 옆자리 아주머니 어깨에 머리를 푹 기대어서 자고 있는 나를 느낄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지금 여기가 이미 내릴 정류장을 지난 것인지, 아는 동네인지 모르는 동네인지조차 알아차리기 전에 타인에게 민폐를 끼쳤다는 사실에 정신이 번쩍 들어 죄송한 마음을 표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너무나도 보통의 엄마 같은, 어찌 보면 무뚝뚝하다고도 할 수 있을 그런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괜찮아요. 많이 피곤한가 봐요? 아직 내릴 곳 멀었으면 좀 더 기대서 자요.”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곧바로 “아직 내릴 곳은 아니긴 한데… 죄송합니다. 괜찮아요.”라며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요즘 학생들 다 너무 바쁘고 힘들게 사는 거 알아요. 얼마나 피곤하면 그랬겠어. 괜찮아, 괜찮아. 좀 더 기대서 자요. 깨워줄게.”라며 반대편 팔로 본인 어깨를 향해 내 머리를 기울이셨다. 머리를 당기는 손길에 당황스럽지 않았다고 할 순 없다. 그럼에도 나는 내심 감사한 마음으로 십 여 분을, 내리기 전까지 그 타인의 어깨 위에서 염치도 모르고 혼자만의 작은 평온을 느꼈다.


동네에 도착해 머쓱한 얼굴로 “감사합니다” 한 마디만을 남기고 서둘러 내린 나는,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길 기다리며 왠지 모르게 그간의 깊은 피로감이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이내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힘들고 피로하고 여유 없던 고된 청춘에게 필요했던 것은 긴 잠도, 따뜻한 잠자리도 그 무엇도 아닌 잠시라도 기댈 수 있을 만한, 위로가 되어주는 어깨 한쪽이었다는 사실을. 그 짧은 이십 여 분 남짓의 시간 동안 흔쾌히 어깨를 내어주었던 한 사람의 호의가 타인의 영혼과 마음을 풍만하게 해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 아주머니는 아셨을까? 그래서 뚝한 표정과는 달리 말은 그리도 따뜻하게 건네면서 작은 영혼을 달래어 주신 걸까?


세상에 펼쳐 놓은 삶의 면적이 아직 그리 넓지 않은 나는, 타인에게 이런 정스러운 호의를 베풀기에는 한참 부족하고 모자람이 크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나 또한 이 좁디 좁은 어깨를 다 내어 주어도 전연 아깝지 않다는 태도로 타인을 대할 수 있는, 흔쾌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야 그 반 만큼이라도 이루며 살 수 있을 것 같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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