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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들 Feb 18. 2020

아이스러운 태도를 유지하려는 마음

“엄마, 그때 진미채 양념이랑 볶는 거, 어떻게 한다고 했죠?”


“고추장이랑 매실액, 다진마늘 조금이랑 해서 양념 만들어서 끓이다가 바글바글 끓기 시작하면 불 끄고 양념 조금 식힌 후에 진미채를 넣어서 양념 골고루 묻혀주면 돼. 꼭 불 끄고 진미채 넣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놓고 먹다 보면 딱딱해지더라고.”


때때로 20년 전의 나로 돌아가 엄마 옆에서 일부러 서성이며 이것 저것 물어볼 때가 있다. 손에서 한 순간도 떼어내지 않고 종일 들고 있는 스마트폰을 켜서 ‘진미채 만드는 법’을 검색하면 몇 초도 되지 않아 수 백 개 이상의 블로그 글과 유튜브 영상이 주르륵 나오는데도 말이다. 물론 엄마 손맛이 내 입맛에 가장 잘 맞기 때문에 검색하지 않고 엄마에게 물어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굳이 엄마에게 귀찮도록 질문하는 것의 표면적 이유, 그 이면에는 엄마의 쓸쓸한 마음을 달래주고 싶다는 생각이 한 켠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25살 가을에 집에서 독립해 나왔다. 연이은 취업 실패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으로 인해 도망치듯 급하게 집을 나왔던 터라 이불과 옷가지 몇 개, 쓰던 화장품 정도만 챙겼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무슨 자신감으로 무작정 집을 떠나왔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모했다.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 때 반찬 한 번 제 손으로 해본 적 없었을 정도였기에 독립 직후에는 “밥은 잘 해먹고 다녀?”라는 말이 가족과의 전화에서 안부 인사를 대신 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냉동 식품이나 반찬가게에서 파는 반찬을 조금씩 사먹었지만, 점차 사는 데 적응하면서 한두 가지씩 요리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블로그에 업로드 된 베테랑 주부들의 레시피와 유명 유튜버들의 요리 영상을 보면서 따라하기 시작하니 자취 5년차, 어느새 한식, 양식, 튀김 등 종류 가릴 것 없이 다양한 집밥을 만들어 먹을 줄 아는 프로 자취러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엄마에게 반찬 만드는 법과 국 끓이는 방법을 물어보고 함께 마트에 가면 어떤 모양새의 채소와 과일이 신선한 지 묻고 또 답을 듣는다. 정말 궁금해서 물어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내 질문에 덧붙여 묻지 않은 것까지 세세하게 곁들여 설명해주는 엄마의 신이 난 말투가 듣기 좋아서 일부러 물어보는 경우가 많다.


“일반 시금치보다 섬초가 더 맛있는 거야. 그리고 다듬을 때 사이 사이에 흙 많으니까 잘 씻고, 뿌리도 잘라내지 말고 살살 잘 다듬어서 뿌리까지 다 먹어. 뿌리에 영양이 많대.”


“소고기 무국 끓일 때 간장을 너무 많이 넣지 말고. 색이 탁해지고, 또 엄마는 간장을 많이 넣으면 좀 깔끔하지 못한 느낌이 들더라. 간장은 조금만 넣고 간이 안 맞으면 마지막에 소금으로 간을 해.”


“갈비는 봉지마다 한 끼 먹으면 딱 좋을 만큼 나눠서 넣었으니까 냉동실에 얼려뒀다가 전날 저녁에 꺼내서 실온에 자연 해동 시켜. 고기에 양념이 어느 정도 배어 있으니까 구울 때 봉지에 들어있는 양념 다 쏟아 붓지는 말고.”




한 달에 한 번씩 집에 한 번 들르면 반찬과 과일로 가득 채운 아이스박스 2개를 차로 실어 날라 택배로 부쳐야 할 정도로 딸의 먹고 사는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엄마. 이런 엄마에겐 “무겁고 힘든데 반찬 하지 말고. 과일도 내가 그냥 사서 먹을게. 엄마 신경 쓰지 마.”라는 말이 그 어떤 말보다도 서운하리라는 사실을 이제는 잘 안다. 때론 자식이 부모의 손을 타지 않고도 모든 것을 혼자 잘 헤쳐나가는 모습이 기특하기보다는, ‘품을 떠난 자식’이라는 생각에 슬퍼지고 맥이 탁 풀린다는 것을 자연스레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항상 내 곁에서 칭얼거리고만 있을 거라 생각했던 자식들이 다 떠나고 남은 자리에서 부모는 자식이 언제 돌아와도 기쁘게 반겨줄 채비를 하고 있으리라. 그렇기에 한편으론 다 커서 어디 내어놓아도 자랑스러운 자식들이 의젓하게 한 사람의 몫을 제대로 해내고 있는 것을 멀찍이서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6살 어린 아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것 저것 질문을 해대는 모습, 먹고 싶은 것을 줄줄이 읊어대며 해주길 바라는 모습에서 부모로서의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이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나는 종종 아무 일도 없으면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처럼 이것 저것 쓸데없는 것까지 귀찮도록 물어보며 그 쓸쓸할 마음을 달래려고 이리도 안간힘을 쓰는가 보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지개를 하염없이 좇는 아이처럼  ©푸들 with 스튜디오 크로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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