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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 하루 Nov 14. 2022

맨얼굴 묵은지

묵은지볶음

어쩌다 보니 매년 12월 첫째 주 토요일이 김장날로 정해졌다. 김장날이 다가올 즈음이면 김치냉장고에 있던 작년 김장 김치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다. 일 년 동안 묵은지는 김치찌개 김치볶음밥, 김치전, 김치 조림으로 다양하게 변신하며 식탁에 올랐다. 이제 새 김장 김치가 자리하기 위해 남은 녀석들마저 잘 먹고 통을 비워야 한다.


소여사가 김치통에서 묵은지 세 포기를 꺼내 흐르는 물에 양념을 털어내며 씻기 시작했다.

"지난번처럼 김치 볶아줄까?"

"좋지!"


빨간 옷을 벗은 김장김치는 하얀 속살을 드러냈다. 그릇에 물을 받고 묵은지를 담갔다. 찬물에 묵은지를 담가 두면 군내와 시큼한 맛이 없어진다. 1시간쯤 지나 묵은지를 건져내고 숭덩숭덩 썰어낸 뒤 달궈진 볶음팬에 담으니 치~하는 맛있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들기름 듬뿍, 설탕 적당히, 다진 마늘 넉넉히, 표고버섯 가루와 멸치 가루 조금씩을 넣고 달달 볶아주었다. 묵은지에서 배어 나온 물이 냄비 아래에 찰랑거리자 센 불로 바꾸고 몇 번 뒤적거리니 물기가 날아간 묵은지가 고슬고슬해졌다.

"간 좀 봐봐."

"좀 싱겁네."

묵은지를 물에 담갔더니 짠맛도 함께 빠진 모양이었다. 소여사표 집간장을 한 스푼 넣고 휘휘 저어주니 간도 딱 맞고 감칠맛이 더해졌다. 들기름 향이 피어나면서 단맛과 짠맛이 적당히 조화를 이루고 무엇보다 배추가 아삭거려 자꾸만 손이 갔다.


첫째가 어려서 김치가 맵다며 먹지를 못하니 소여사는 물에 김치 양념을 씻어내고 아이에게 먹이곤 했다. 빨간기가 사라진 김치를 덥석덥석 잘 먹는 걸 보고 소여사가 궁리해 낸 방법이 김치 양념을 씻어내고 요리를 하는 것이었다. 빨간 고춧가루 옷을 벗은 묵은지는 화장을 지운 맨얼굴 같다. 씻은 묵은지는 화려함은 없지만 수수하고 친근하다. 묵은지 그대로의 요리는 먹음직스럽게 보이고 고춧가루 맛이 매콤하게 남아 있지만 씻은 묵은지는 뭔가 빠진 듯 심심해 보이지만 배추의 아삭 거림과 매운맛을 뺀 다른 맛들이 더욱 살아난다.


씻은 묵은지에 국멸치와 물을 넣고 간을 한 후 자작하게 끓여낸 하얀 김칫국도 일품이다. 김치의 깔끔한 맛에 멸치의 구수한 맛이 더해져 색다른 맛이 된다. 자극적이지 않고 슴슴하지만 담백하다. 국처럼 따뜻하게 해서 먹어도 맛있고, 냉장고에 넣어 시원하게 꺼내 먹으면 김치처럼 반찬이 된다. 김치전도 김치볶음밥도 김치 양념을 씻어내고 만들어주면 맵지 않아 아이들이 잘 먹었다.


이제 빨간 김치 그대로도 잘 먹을 만큼 컸지만 아이들은 할머니에게 종종 양념을 씻어낸 김칫국이나 김치볶음을 해달라고 한다. 아이들이 조금 더 자라면 빨간 묵은지에 청양고추 송송 썰어 넣어 더 맵고 칼칼하게 음식을 해달라고 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씻은 김치를 먹었던 어린 날의 아이들을 떠올리며 함께 웃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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