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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 하루 Nov 20. 2022

잡채 꽃이 피었습니다

잡채

교육대 다니던 예비교사 시절 실과 실습 시간에 두 가지 음식을 만들었다. 버터크림 케이크와 잡채. 실과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은 두 음식을 고른 건 전적으로 교수님의 취향이었다. 허브잎과 딸기로 데코레이션을 잘한 탓에 버터크림 케이크는 무난하게 통과했는데, 잡채가 문제였다. 명절마다 먹었고, 소여사가 뚝딱 만들어주기에 쉬운 음식인 줄 알고 만만하게 보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조원이 함께 만들어낸 당면의 모습은 참혹했다. 허여 멀 건한 당면은 퉁퉁 불고 서툰 칼질로 썰어낸 야채들은 제각기 딴 곳에서 놀고 있었다. 보기 좋은 것이 맛도 좋다고 했던가. 맛 역시........(상상에 맡기겠다.) 그렇게 인생의 첫 잡채는 망했다.


며칠 전, 오랜만에 동생 가족이 놀러 와서 소여사 집에 모이게 되었다. 소여사가 선택한 메뉴는 잡채. 팔팔 끓인 물을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에 가득 붓고 가장 큰 당면 봉지를 뜯어 넣는다. 인터넷에 당면을 익힐 때 물에 넣고 같이 끓이기도 하던데 소여사는 늘 끓인 물에 당면을 서서히 익힌다. 당면을 언제 꺼내면 되냐는 물음에 당면이 투명해지면 꺼내도 된단다. 당면이 익는 동안 돼지고기, 파프리카, 당근을 볶아주고 시금치는 데쳐서 소금과 다진 마늘을 넣어 무쳐둔다. 다 익은 당면에 간장, 설탕을 넣고 버무려주면 당면에 거무스름한 간장 색이 배이고 당면의 자태가 반지르르 해지며 먹음직스러워진다. 준비해 둔 다른 재료들을 같이 버무리면 초록, 빨강, 노랑의 알록달록한 잡채 꽃이 핀다.

스테인리스 대야에 버무려 놓은 잡채

기름을 넣지 않고 한번 더 볶아낸 잡채를 커다란 접시에 담아 통깨를 솔솔 뿌려 상에 내었다. 다들 고개를 박고 후루룩 잡채를 먹느라 말이 없다. 잡채를 좋아하는 둘째는 밥도 먹지 않고 잡채만 공략한다. 야채는 조금, 당면은 많이 달라는 첫째 주문에 맞춰 당면을 넉넉히 담아 첫째에게 전달하고 나서야 맛을 볼 수 있었다. 짭짤하고 탱탱한 당면과 아삭 거리는 야채가 어우러져 맛이 좋았다. 소여사표 잡채는 당면이 쫀득거린다. 퍼져서 서로 달라붙어있거나 기름진 느낌이 적다. 아마도 끓인 물에 서서히 익힌 것이 비법이지 않을까 유추해본다.


돌아가는 동생네 손에 한 봉지, 우리 집에 한 봉지 덜어주고 나니 그 많던 잡채가 사라지고 없었다. 너무 많은 거 아니냐며 소여사에게 싫은 소리를 했는데 텅 빈 그릇을 보니 머쓱해졌다. 가장 큰 봉투 당면을 사고, 야채를 넉넉히 넣어 푸짐한 잡채를 해내기까지는 수련이 더 필요할 것 같다. 언젠가는 나도 푸짐하고 맛 좋은 잡채 꽃을 피워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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