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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 하루 Nov 25. 2022

도서관 냄새

오롯이 나

오랜만에 혼자 도서관에 갔다. 주말에 아이들을 데리고 도서관에 가는 남편에게 읽고 싶은 책을 대출해 달라고 부탁하거나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사서 보니 편하기는 했지만 책으로 꽉꽉 채워진 서가에 서서 이 책 저 책 뒤적이며 책을 고르는 재미가 없다.


그럴 때가 있다. 어떤 냄새를 맡는 순간 기억 스위치가 탁 하고 켜지는 순간. 2층 열람실에 오르는 계단에서부터 여러 사람의 손때가 묻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기억의 스위치가 켜진 곳은 고등학생 때 다닌 도서관이다.


지금은 익숙한 수행평가와 봉사활동이라는 것이 처음 도입되었던 시절이었다. 요즘은 봉사활동 사이트에서 미리 신청을 하고 봉사활동을 한다고 하는데 그런 시스템이 없었으니 관공서에 전화로 봉사를 가도 되는지 직접 물어보고 봉사활동을 하러 다녔다. 도서관도 그런 곳들 중 하나였다.


봉사활동을 가면 대개 청소 등의 허드렛일을 시키게 마련인데 똑단발에 단정한 옷을 입은 친구와 내가 착실해 보였던지 사서는 청구 번호 보는 법을 찬찬히 알려주고는 북 트레이에 있는 책을 꽂으라고 했다. 청구 번호를 보고 서가에 책을 꽂으며 수많은 800번대의 소설들을 만났다. 표지, 제목, 작가, 출판사 같은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현진건, 김동리, 김유정, 이상을 만났다. 시절의 문체가 가득 담긴 작품을 읽으면서 야릇한 만족감을 느꼈다.


한국 단편소설을 읽고 나자 '토지'가 보였다. 내 독서 이력은 '토지' 전과 후로 나뉜다. '토지'라는 대하소설을 완독하고 나자 이루 설명할 수 없는 단단한 것이 내 안에 채워졌다. 어떠한 책들을 마주해도 읽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차올랐다.(물론 이건 그때의 감정이다. 수많은 책들을 완독 하지 못했고, 좌절하기도 했다.) 처음으로 마라톤을 완주한 선수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토지'를 읽은 사람이 된 것이다. '토지'를 읽는 내내 그 속에 빠져들어 행복했다. 쉬는 시간에도 책을 읽느라 바빴고, 간혹 수업 시간이 늦게 끝날 때면 책 내용이 궁금해 좀이 쑤셨다. '토지'를 끝내고 다른 대하소설들을 읽어 나갔다. '태백산맥'과 '한강'을 차례로 완독 하고 서울대를 가려면 꼭 봐야 한다는 이문열의 '삼국지'도 그 시기에 모두 읽었다. 은희경과 같은 여성 작가들의 소설에 매료되었다.


그 시절, 문학의 아름다움과 문학을 향유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참 다행이다. 그때 도서관에서 봉사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사서가 나에게 책 꽂는 일을 시키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기쁨이다. 긴 호흡의 책도 지치지 않고 읽었던 그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입시에서 해방된 지금 오히려 그때보다 더 저돌적으로 독서하지 못한다. 새로운 세계에 처음 발 디딜 때의 열정은 시작할 때 주어지는 선물인가보다. 


오늘, 그 시절처럼 겹겹이 둘러싸인 서가 속에서 보물을 찾아 나섰다. 이미 읽었던 책을 만나자 오랜 벗을 만난 것마냥 반갑고,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만나니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처럼 가슴이 뛴다. 한 권 한 권 들춰보며 신중하게 여섯 권의 책을 골랐다. 두 손 묵직하게 대출한 책을 들고 나오며, 더없는 만족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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