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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 하루 Nov 28. 2022

시절을 잃어버린 곳

재개발 구역을 산책하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 3권을 다 봤다는 핑계로 혼자 도서관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남편은 차를 가져가라고 했지만 살랑이는 바람이 좋아 산책 겸 걸어가겠다고 했다. 가로수 잎들의 사각사각 밟히는 소리를 들으며 혼자 만의 시간을 가졌다. 


도서관은 재개발구역 안에 있다. 늘 차로만 다녔던 곳을 걸어서 들어가려니 낯설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로 들어가는 느낌? 공사 구역 입구에 나른하게 앉아 있던 남자는 나를 흘끗 보더니 핸드폰으로 다시 시선을 주었다. 무너진 건물 잔해가 양쪽에 있는 도로를 뚜벅뚜벅 걸었다. 인도까지 침범한 콘크리트 조각 때문에 도로 가운데로 걸었다. 지나가는 사람도 차도 없었다. 직진으로 걸어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금방 도서관에 들어갔지만 그 짧은 길이 황량하고 어색해 걸음을 재촉했다.


어쩐 일인지 주택은 다 허물었는데 도서관은 아직 열려있고, 도서관 맞은편에 있는 학교는 학생을 잃고 생기를 잃은 채 서 있다. 다른 도서관보다 사람이 적어 신간 도서를 빌리기 좋고, 오랜 시간 다닌 추억이 있는 장소라 2주에 한 번씩은 찾아가는 곳이다. 열람실에서 임용고시 시험서와 한국사 능력 시험 책을 보며 공부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아이를 낳으면서 아이 손을 잡고 와 어린이 책을 읽어주고 빌렸던 곳이다. 그 시간 동안 도서관은 낡은 곳을 고쳐가며 오랜 시간 그 자리에서 책을 빌려주고 공간을 나눠주었다.


5권 책이 담긴 가방을 들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가는 길에는 무거운 연장을 어깨에 짊어진 사람을 지나쳤고 커다란 덤프트럭 두 대가 지나갔다. 일정 간격으로 서 있는 노란 은행나무에 접근 금지 띠를 둘러놓았다. 이곳은 가을에 무척 예쁜 길이었다. 굽어진 찻길을 따라 은행나무 잎들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은행나무 길을 걸으려 가을에는 더 도서관에 가고 싶었는데.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곳에서 은행나무는 애써 맺은 열매를 쓸쓸하게 떨어뜨려 놓았다. 


10여 년 전부터 재개발 플래카드가 길가에 걸리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부터 사람들이 살던 집에 X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알리바바와 12명의 도둑들에서 도둑들이 집마다 표시를 해둔 것 같은 암호가 점점 늘어나더니 아무도 살지 않게 되었다. 빈 집에는 사람들이 쓰던 가전제품과 쓰레기가 뒹굴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키우던 개도 두고 가는지 개를 버려두고 가지 말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집들은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라면처럼 꼬불거리는 철근 뭉치와 건물 잔해만이 가득하다. 시간이 지나면 주변의 고층 아파트와 비슷한 모양의 건물들이 들어설 것이다. 지금의 흔적들을 찾을 수 없는. 


골목골목 자리한 집들과 오래된 슈퍼, 생닭을 잡아 파는 곳, 쌀을 파는 곳, 건강원이 사라졌다. 봄이면 빨간 장미꽃 피던 담이 있던 집도, 자그마한 화분들이 가득한 집도, 지팡이 짚고 햇볕 쬐러 나오시던 할머니가 살던 집도 모두 다 사라졌다. 골목이 주던 정겨웠던 풍경이 사라지고 사람 냄새나던 곳이 사라졌다. 모두 다 비슷한 모양으로 생긴 아파트가 그 자리를 채울 생각을 하니 조금은 슬픈 생각이 들었다.


그곳을 지켰던 수십 개의 은행나무가 뽑혀 나가던 날, 집들을 지키고 있던 성주신들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길을 떠날 것이다.




작년 이맘때쯤 써둔 글입니다. 지금은 황토흙만 가득한 황량한 곳이 되었고, 아파트가 지어질 준비가 한창입니다. 이곳에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선 후에야 도서관은 문을 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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