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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 하루 Jan 04. 2023

초록색 단맛, 매실

매실청

매화가 피는 고장에서 나고 자랐다. 매화의 도도하고 기품 있는 맵시와 진한 향기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알게 되었다. 내 고장에서 매화가 많이 핀다는 것은 매화가 아닌 매실을 보고 알았다. 매실을 따는 시기가 되면 시장에는 초록색 촘촘한 망에 가득 담긴 매실을 벽돌처럼 쌓아두고 팔았다.


매 해 여름 소여사는 시장에서 매실을 샀고, 매실이 집에 들어오면 진짜 여름이 시작되었다. 여름을 닮은 초록색 단단한 매실은 보기만 해도 입에 침이 고였다. 솜털이 보송보송하고 윤기가 흐르는 매실이 분명 지독한 신맛이 난다는 것을 알지만 항상 입에 넣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했다.


어려서부터 상비약처럼 배가 아프면 무조건 매실청부터 찾았다. 한여름 찬음식을 많이 먹어 배앓이를 할 때도, 과식으로 체했을 때도 매실을 먹으면 부글거리던 뱃속이 가라앉곤 했다. 여름에는 얼음을 동동 띄워 차갑게 먹고, 겨울에는 따뜻한 물을 부어 먹었다. 차가울수록 단맛이 진하게 느껴지지만 따뜻한 물에 타서 먹었을 때 느껴지는 따뜻한 새콤함도 찬 것과 다른 매력이 있다. 매실청은 고기를 잴 때, 겉절이를 할 때, 나물을 무칠 때와 같이 여러 요리 발넓게 쓰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집에는 매실청이 담긴 2L 생수병이 줄을 맞춰 서 있다.


빨갛고 커다란 고무대야에 매실을 붓고 물로 여러 번 헹군 뒤에 같은 무게의 설탕을 고루 뿌린다. 골고루 뿌리는 것으로 성이 차지 않는 소여사는 고무장갑을 끼고 허리를 숙여 매실과 설탕이 잘 섞이도록 뒤적였다. 그렇게 몇 차례 뒤적이다 보면 고슬고슬하던 매실 표면에 설탕이 찐득거리며 달라붙는다. 그렇게 매실이 갖고 있던 물기를 끌어낸 후에야 유리통에 담는 것이다. 꾹꾹 힘을 주어 유리통에 담은 뒤에 3개월 정도 두면 매실이 품은 새콤한 맛과 설탕의 단맛이 섞인 매실청이 된다.


언젠가는 하얀 설탕이 몸에 좋지 않다고 들었다며 흑설탕으로 매실을 담갔더니 캐러멜색 매실청이 되었다. 맛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소여사는 색이 예쁘지 않다고 투덜댔다. 그 뒤로는 하얀 설탕으로 쭉 담근다. 매실이 가진 색깔이 흰 설탕을 은은한 노란빛으로 물들인다.


고기 요리를 먹고 나면 소여사는 손주들이 혹여나 체할까 싶어 매실청을 꼭 물에 타서 먹이셨다. 덕분에 매실맛을 알아버린 아이들은 이제 제 손으로 매실청을 물에 타서 먹는다. 내가 탄산수에 매실을 타서 먹는 것을 먹어보고는 톡톡 쏘는 맛도 알아버렸다. 탄산음료를 먹지 못하게 하는 대신 탄산수에 매실청을 타 먹는건 가끔 허락해 준다.



물이건 탄산수건 맛을 담당하는 것은 매실청이다. 그 해 수확한 매실 맛에 따라 온도와 습도, 햇볕에 따라 매 해 조금씩 단맛과 신맛의 비율이 조금씩 차이가 난다.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소여사의 매실청은 늘 인기만점이다. 덕분에 매실 40kg으로 담근 매실청이 금방 바닥을 볼 것 같다. 소여사는 한 해씩 걸러 담그려고 했는데 손주들 때문에 매년 담게 생겼다며 야단이다.


소여사는 푸념과 다르게 매실청 담긴 2L 생수병이 비워지기 무섭게 매실청이 꽉 채워진 새 병으로 가져다 놓는다. 봄의 햇살과 바람을 품고 여름에 설탕을 만나 가을에 맛볼 수 있는 매실청. 추위가 지나가고 이른 봄에 꽃을 피운 뒤 단단한 초록열매를 만나는 날을 기다려본다. 올해는 새콤한 맛일지, 달콤한 맛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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