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선숙 Nov 15. 2019

네 번째 보라카이

새로운 흔적을 만들어내는 것


 샤워를 마치고 나왔더니, 남편과 아들은 곤히 자고 있다.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자세로 잠들어 버린 두 남자를 뒤로하고, 냉장고에서 산미구엘 맥주 한 캔을 꺼냈다. 테라스에 나가 의자에 앉았다. 코코넛 향 섬유유연제 같은, 필리핀 특유의 냄새가 섞인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고요한 리조트, 조명이 어리어리 비추는 수영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기는 ‘보라카이’다.



 정수리가 탈 듯한 강렬한 태양, 곱고 하얀 모래, 야자수 잎 사이로 보이는 검붉은 노을, 밤이 되면 쿵쿵 음악들로 가득한 펍, 투명한 바다, 어설픈 한국어 호객 행위조차도 싱그러운 곳이다. 여기저기 새록새록 기억나는 순간이 가득한, 보물찾기 같은 섬. 여기에 대단한 짐짝을 데리고 왔다.

 “쉬 마려워요. 물 먹고 싶어요, 더워요, 땀나요.” 사랑스러운 짐짝은 틈만 나면 징징거린다. 지치지 않는 에너지로 바다와 수영장을 오고 가며 인간 물개로 변신하는 아들! 아들과는 처음인, 네 번째 보라카이를 오고 말았다.




 우리의 일상은 수영복을 입은 채 물놀이로 시작하여 물놀이로 끝났다. 작은 물고기는 사람들 발 사이로 헤엄쳤고, 아이는 물고기가 자기 발을 먹을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나에게 매달려 있었다. 그마저도 좋았다. 추억이 깃든 섬에서, 20kg 짐이자 내 보물인 아들과 물결 따라 일렁이고 있으니까. 영어 울렁증인 우리 둘을 챙겨야 하는, 나의 짝꿍까지 함께 말이다.  



 그때였다. 아이 튜브 위로 작고 단단한 무언가가 떨어졌다. 아이는 벌레로 착각했는지 “으악 이게 뭐야아아.” 놀래며 야무지게 손으로 내쳤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그것, 반짝이는 하트 모양 귀걸이였다.

 퐁당! 바닷속으로 빠져버렸다. 남편은 스노클링 마스크를 쓰고 귀걸이를 찾아 헤맸다. 작은 귀걸이 한 짝이 보일 리가 없었다. 내가 아끼던 하트 귀걸이 한 짝은, 영영 보라카이에서 살게 되었다.      



 왼쪽 귀에만 하트 귀걸이를 한 채, 내가 아끼던 펍 ‘에픽’에 들렸다. 바닷바람을 맡으며, 힙한 음악과 레이저 빛이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던 곳. 칵테일을 너무 마셔 다음 날 격한 숙취를 동반했던 이곳에 다시 와 설레었다.

 아들의 손에 색종이를 한 움큼 들려주고, 남편과 칵테일을 시켰다. 우리는 예전 이야기를 하며 원샷했다. 모히또, 마르가리타, 진토닉, 맨해튼...... 이름도 영롱한 술이 찰랑대는 잔을 금세 비웠다.     




  “프러포즈 때 기억나?”

 남편이 물었다. 잊어버릴 수 없지. 강렬했던 그때의 보라카이를. 그가 몰래 반지를 챙겨 같이 여행 온, 이곳의 리조트는 복층이었다. 결론적으로 복층이어서 다행이었다. 첫날, 야자수 잎과 장미가 어우러진 현지 느낌의 꽃다발과 반지를 받았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무언가를 먹고 심하게 탈이 나고 말았다. 나보다 먼저 낌새가 온 남편은, 출산하듯 고통스러워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나도 복통이 찾아왔고, 자연스레 각각 1층과 2층 화장실 담당이 정해지며 들락거렸다. 뒤늦게 약을 구해 살겠다 싶었지만 이미 기력이 다 떨어진 상태였다.



 마지막 날, 겨우 바닷가를 걸으며 셀카 모드로 우리 모습을 찍었다. 눈 아래가 어두웠고, 볼살이 쪽 빠져 팔자 주름이 도드라졌다. 웃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처량하게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좋냐며 사진을 보내라고 독촉하는 친구에게 그 사진을 전송하니 이런 답이 왔다. [너네, 이상하게 사연 있어 보여]

 휴가를 마치고 복귀한 직장에서 사람들은 “왜 이렇게 얼굴이 상했냐, 늙었다” 반응이었다. 그래서 더 잊을 수 없다. 둘이 쥐어짜는 복통을 견디며, 버텼던 전우애가 남아 있는 보라카이를 말이다.



 낄낄거리며, 마지막 잔을 비웠다. 아이가 그런 우리를 보고 궁금해했다. 이야기해주니, 그럼 자기는 어디에 있었는지 물었다. 그때는 몰랐다. 우리가 무사히 결혼하고, 너의 부모가 될 줄이야. 너와 함께 여기 ‘에픽’에서 마음 홀리는 칵테일을 경쟁하듯 마시고 있을 줄이야.



 알딸딸한 상태가 된 나는, 남편과 아이와 함께 밤 수영을 즐겼다. 아름답던 수영장에 우리 빼고, 커플뿐이었다. 우리가 물을 흐리는 것 같아 미안해졌다. 뽀뽀하고, 사진 찍고, 다정하게 수영을 가르쳐주는 커플들. 그 옆에서, 아들은 얼굴만 빼꼼히 내밀고 똥개처럼 이리저리 헤엄쳤다.

 해외에서도 어김없이 아들은 역할놀이를 하잔다. 어질어질 실감 나는 나의 귀신 역할에, 아이는 괴성을 질렀고 커플들은 그 모습에 웃었다.

 ‘웃냐, 너네도 나중에 이렇게 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삼키며, 방으로 돌아왔다.     

 


 평온하게 자는 두 남자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마지막 맥주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마셨다. 더운 바람이 이마와 볼을 가볍게 쓸었다.

 한 발자국마다 꾹꾹 눌러서 길을 걷던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러면 보라카이에 내 발자국이 오래오래 남아요.”라며, 아이는 눈부시게 웃었다. 나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함께 발자국을 남기며 해변을 걸었다. 작은 발자국에, 남편과 내 발자국이 합쳐졌다.

 서로 다른 크기의 흔적들이 만나 새로운 흔적을 만들어내는 것. 우리의 일상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벅차올랐다.





 네 번째 보라카이. 다시 생각해도 이곳은 내게 보물찾기 같은 섬이다. 군데군데 나의 발걸음, 기억 너머의 추억, 우리의 웃음이 숨겨져 있으니까. 게다가 작은 것 하나까지 소중해질 테니까.

 더 많은 것들을 남기고 싶어 졌다. 올 때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하나씩 찾을 수 있게 말이다.

 모래를 가볍게 쓰다듬는 파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것 같다. 아, 바닷속 내 하트 귀걸이 한 짝은 물고기들의 보물이 되었으려나.


-다음에는 부디 혼자 가게 해주세요-
이전 11화 뜨거운 물에 발을 담그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