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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선숙 Sep 07. 2019

뜨거운 물에 발을 담그면

엄마처럼, 애정을 담아 무심한 듯

 "난 뭐 하는 사람이지?" 요즘따라 나의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질문이다. 아내이자 엄마라는 공식 역할이 있음에도, 온전히 나 하나만을 놓고 생각하면 답이 나오지 않았다. 마치 남편과 아이의 교집합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존재 같이 느껴졌다.

 


 새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알싸한 공기가 내려앉는 새벽 2시, 조용히 화장실로 가서 뜨거운 물을 받았다. 입구에 수건을 깔고 앉아, 물속으로 발을 넣었다. 발등의 감각이 사라질 것 같은 온도였다. 차차 열기가 올라왔다. 마음이 '훅' 하고 가라앉았다. 숨을 크게 쉬어 뱉었다.

 지금처럼 주저앉고 싶은 순간, 엄마의 목소리가 간절하게 그리워진다.


 "여자야, 와서 족욕 해."

 엄마는 나를 '이삐딸' 이나 '여자야'라고 불렀는데, 특히 '여자야'라고 할 때는 특유의 톡 쏘는 새침함이 묻어난다. 부산 사투리 억양이 섞여, 조금 쌀쌀한 느낌이다.

 엄마의 목욕 스타일은, 뜨거운 물을 미리 한가득 받아 놓고 씻는 거였다. 그렇게 씻고 남은 물을 세숫대야에 담아 나를 불렀었다. 방에서 몇 번이고 "안 해!"를 외쳤다. 끝까지 부르는 통에 투덜거리며 느릿느릿 화장실로 움직였다.



 두 발이 들어가면 가득 찰 크기, 바닥에는 곰돌이 그림이 그려진 베이지색 세숫대야가 보였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후후 불고 있으니, 엄마의 목소리가 울렸다.

 "뭐해. 일단 발을 넣어."

 발가락 끝부터 살짝 담갔다. 촐싹거리며 넣었다 빼길 반복하다가 고개를 들어 엄마를 바라보았다. 긴 웨이브 머리카락은 촉촉하게 젖어 있고, 이마에는 얇게 돌돌 만 수건을 머리띠처럼 두르고 있었다. 김이 서린 거울을 보며, 로션을 찰지게 짝짝 바르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더운 수증기가 화장실을 가득 메우고, 로션 바르는 소리만이 침묵을 깨고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화장실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걱정이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라고 내뱉었을 거다. 우리의 성스러운 의식처럼, 미지근하게 물이 식을 때쯤 데운 물이 조용히 채워졌다. 이내 두 발은 다시 벌겋게 달아올랐다.


 



 스물여섯, 의류 쇼핑몰을 하겠다는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었다. 틈틈이 창업 설명회도 찾아가서 듣고, 동대문 시장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확신이 있었다. 미리 사전조사까지 했음에도 막상 회사를 나오니 마음이 달아지는 거였다. 해낼 수 있을까 싶은 두려움이 앞서, 급하게 다시 회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도 저도 아닌 백수가 되어버렸다. 면접 전화는 울리지 않고, 시간만 흘려보내는 것 같았다. 계획대로 쇼핑몰을 열까. 줏대 없이 흔들리는 마음 때문에 스스로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아빠는 처음부터 퇴사를 반대했었다. 엄마는 나를 믿어주자 했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좋아하는 옷으로 일과 즐거움을 다 잡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가족의 얼굴을 보기가 낯 뜨거워서, 작은 방구석이 찌그러져 있을 뿐이었다. 움츠러들어 몸을 말고 있던 나를, 끌고 나오게 한 것.

 엄마의 "여자야, 와서 족욕 해." 소리였다.



 내 발과 엄마를 바라봤던 시간. 엄마는 따뜻하거나 다정한 말투로 '어떻게 되어 가?'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내심 엄마의 '힘내'라든지 '응원한다'라는 말을 바라기도 했다. 아마 그랬다면 둘만의 시간이 부담스럽게 다가왔을 거다. 그리고 난 방으로 도망치듯 숨었겠지.

 쪼르륵. 식어가는 물에 따듯함이 더해졌다. 말없이, 엄마의 마음이 전해졌다. 온기가 발부터 퍼져, 몸 구석구석을 데우며 기분 좋게 노곤해졌다.

 이 시간만큼은 여유로워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만 같았다. 회사를 나온 죄책감도, 새로운 도전에 대한 초조한 마음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때의 스물여섯의 나는, 지금 서른여섯이 되었다. 아름다웠지만 서툴고 무모했던 시절을 거쳐, 사십 대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어른이 되어도 끊임없이 나에 대해 고민하고, 선택에 앞서 갈팡질팡한다. 그럴 때마다, 발을 담그며 엄마를 바라봤던 나를 떠올려본다.

 쫄깃하게 로션을 바르던 엄마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발이 달아오를 때마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스르륵 풀렸다는 것도 알까. 계획대로 쇼핑몰을 운영할 용기가 생겼다는 것도 말이다.



 엄마는 담담하게 '남아있던 물이 아깝길래, 매번 불러서 시켰던 거야' 라 말할지 모른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살짝 충격일 것이다. 그래도 나에겐 몽글한 수증기만큼이나 따스한 순간이었기에 괜찮다.



 곁에 있는 이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어깨가 축 내려가 있다면, 데려가 따뜻한 물을 받을 것이다. 두 발을 담그기를 조용히 기다릴 테고. 미지근해지는 순간, 재빨리 온기로 가득 채워주고 싶다.

 쪼르륵 소리에 긴장이 풀리고, 다시 일어설 힘이 생기기를. 엄마처럼, 애정을 담아 무심한 듯 지켜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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