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미련도 괜찮을 것 같아

- 임승유 <<그 밖의 어떤 것>>을 읽는 밤

by 목요일그녀


기다림과 머뭇거림, 하고 싶은 말과 하지 못한 말.

우리는 종종 어떤 선택을 앞두고 어느 쪽이 최선인지 고민한다.

정답은 없기 때문에, 되도록 최선인 쪽을 선택해야 후회가 덜 할 거라는 생각 때문에.

혹은 그래야 덜 두렵기 때문에.


언제부턴가 나는 어떤 선택을 앞에 두고 최선이라고 생각되지 않아도, 조금 더 실패 확률이 높다고 판단되더라도

내 마음이 움직이는 쪽으로 선택하려고 노력한다.

후회는 언제나 늦고, 걱정은 늘 걱정으로 남기 때문에 적어도 선택의 순간 내 마음이 좋다고 하는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은 것.


임승유 시인의 『그 밖의 어떤 것』을 읽으면서 자주 머뭇거림에 대해 생각했다.

하고 싶은 말에 대해 생각했다. 미처 하지 못한 말 혹은 하지 않은 말에 대해서도.

그건 대부분 기다림에 맞닿아 있었고, 누군가에게 기대 있었는데 그 순간조차 온전히 기다리거나 온전히 기대지 않았다.


어떤 것.

내가 선택한 것 외의 어떤 것. 혹은 내가 선택한 어떤 것.

삶은 늘 선택과 후회로 연결되어 완성되는 건 아닌지.


잡고 싶은 마음

안녕하세요.

인사를 받았다. 돌려주기 위해 물어보았다. 아는
사람이라 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앞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을 보내고

가던 길을 갔다.

기억에 남았다. 기억을 못해 나중에 더 많이 돌려
줘야 했던 때도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도 있
었다. 뒤에 숨어 쳐다보는 것은 아니었다. 죄책감이
들었다. 먼저 갔다가 되돌아와도 가깝지는 않았고

여기서 알았다. 나를 알기 전에

- <잡고 싶은 마음> 전문


'지금은 아니지만 앞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내가 지나다니며 마주치는 무수히 많은 익명의 사람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그들의 옆모습을 흘낏거리기도 하고, 혹시 아는 얼굴인가 다시 바라보기도 했다.

한번 스쳐지나 갈 인연일 수도, 다시 만날 인연일 수도.. 사람 일은, 사람 인연은 아무도 모르지만 앞으로 알 수도 있는 사람이니까, 조금 더 다정하게. 그리고 가던 길을 가야지


네가 이야기를 마치고 나간 후

네가 앉았던 의자는 일어서는 자세를 갖게 되었
다. 내가 일어나 앉히기 전에는 계속 일어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일어날 수가 없었는데

내가 일어나지 않아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다. 네가 이야기
를 마치고 나간 후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누구도
대답해줄 수 없어서 나는 그만 일어나야 했지만 내
가 앉았던 의자는 일어서는 자세를 아직 갖기 전이
었다.
- <네가 이야기를 마치고 나간 후> 전문


상상해 본다.

두 사람이 앉아 있다가.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누군가 먼저 일어나 자리를 떠난다.

남은 사람은, 아직 미련이 남아서 차마 일어나지 못하고 먼저 일어나 사람의 의자를 바라보고 있다.

이미 이야기를 사라졌지만, 이미 그 이야기를 나눈 사람도 떠나버렸지만

아직 떠날 자세를 갖지 못한 나의 마음은 애꿎은 의지만 붙들고 앉아 있다.


자주 혼자 들르는 카페에 앉아 책을 읽거나 노트북을 보고 있으면 들으려 하지 않아도 옆 테이블의 이야기가 들려올 때가 있다. 즐거운 이야기보다 슬픈 이야기가 더 크게 들린다.

그럴 경우 대부분 한쪽은 그만하자, 한쪽은 안돼, 라는 식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누군가 먼저 떠났던가. 그건 희미하지만 언제나 이야기는 남았다.

나는 그들이 아니었지만, 마치 그들 중 한 명이라도 된 듯 쉽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했다.


이 시는 어쩐지,

그런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이야기만 남은. 사랑이었으나 한쪽의 사랑이 끝나 버린, 그 이별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하는 의자는 어쩌면 남은 이의 마음이 아니었을지.


고전소설

한번 살아보겠다며

너는 걸어 들어갔다. 뒤에 있던 나는 앞으로 어
떻게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앞으로 잘 살아
말해주었고 너는 나아갔다. 남겨놓은 게 나라서
1인칭시점을 지킬 수 있었던 나는 창문을 열었고

가다가
뒤를 보지 않았던 너는 앞으로 펼쳐질 장면 속에
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질 것이며 누군가를 만나 사
랑에 빠지고 위기에 처하게 되더라도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으므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 <고전소설> 전문


어쩐지 이 시를 읽으면서 마음이 놓였다.

한번 살아보겠다고 떠나간 누군가의 삶이 불행이 아니라 행복이라서.

혹여라도 누군가를 남겨두고 떠났더라도, 남겨진 이의 마음이 지옥이 아니라서.

훗 날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서.


이 시집 속의 시들을 읽는 내내 그랬다.

불안보다 안도를, 기다림의 인내와 슬픔보다는 기다림의 달콤함을, 하지 못한 말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던 말들에 대한 안심을. 어쩐지, 누군가는 어디선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따뜻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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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의 어떤 것>> / 저자 임승유 / 출판 현대문학 / 발매 2018.08.31.


덧붙임


1. 임승유 시인의 전 시집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봐>와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더 매력적이었다. (이 시인이)

https://poohcey.blog.me/220894064102

2. 얇은 시집이다. 현대문학의 PIN 시리즈는 소설만 좋은 줄 알았지. 하아- 시집도 좋았어.


3. 시집의 마지막에 실린 시인의 에세이 중 마음에 남는 문단을 옮겨둔다.

『네가 나를 비난하며 지낼 때 너에게 나를 설명할 수도 있었다. 네가 간과한 부분과 네가 넘겨짚은 부분과 네가 동일시한 부분에 대해. 하지만 동시에 알고 있었다. 설명하고 나면, 설명을 통해 관계를 낱낱이 분석하고 나면 관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나에 대한 너의 비난이 시간과 함께 무뎌지면서 이해에 다다르기를. 그 지난한 과정을 견디는 게 어떤 건지. 』


어쩐지 시인들이 쓰는 에세이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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