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시작하는 마음
대학 졸업 후 딱 일 년만 돈 모아서 글을 써야지 마음먹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소설가를 꿈꿨다. 이십 대의 내 삶은 온통 ‘소설’로 가득했다. 언젠가 등단할 수 있겠지. 계속 쓰다 보면 작가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주문을 걸며 어두운 시간을 견뎠다. 그렇다고 꿈이 생계를 유지해 주는 것은 아니라서 ‘돈’을 벌기 위한 최소한의 경제활동은 해야 했다.
딱 일 년만 하겠다고 입사한 직장에서 올해로 19년을 채워 근무하고 있다. 그 사이 결혼도 하고 두 아이도 낳았다. 19년 차 직장인, 11년 차 일하는 엄마로 지냈던 일을 하나하나 풀어놓자면 한도 끝도 없고, 딱 한 마디로 줄이면 ‘미친년’처럼 살았다. 적어도 다시 꿈꾸기 전인 지난 8년 동안은.
블로그 앱에 접속하니 ‘3년 전 지난 오늘, 블로그에 남겨둔 추억을 돌아보세요’라는 배너가 떴다. 대부분은 무심히 넘겨버렸는데 ‘잘하고 있어!’라는 제목이 나를 움찔하게 했다.
3년 전이면, 서른아홉이 되고 둘째를 출산한 지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출산휴가 중이었고, 첫째 아이가 막 초등학교에 입학해 엄마 손이 많이 필요한 때이기도 했다. 하루하루 정신없이 살아서 어떻게 하루가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닥친 일들만 간신히 해결하며 살았다. 모유 수유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동생이 생겨 갑자기 어린아이로 변해버린 첫째 아이의 마음 다독이느라 스스로를 돌아볼 새도 없이 하루하루가 울고 싶은 날이었다.
집에 있을 때 거울을 잘 보지 않는다. 화장실을 오갈 때나 화장대 앞을 지날 때 얼핏 본 내 모습에 갑자기 울컥. 긴 머리가 아기를 안거나 분유를 먹일 때 불편할까 봐 매일 질끈 묶고 있고, 활동하기 편한 헐렁한 옷만 입고, 하루에도 몇 번씩 울컥 토하는 아기 분유 냄새가 몸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다고, 엄마로 충실히 잘하고 있다고 내가 나를 위로하는 어느 오후. - 2018년의 어느 날 일기
‘잘하고 있어’라고 썼지만 사실 나는 무너지고 있었다. 일기를 쓴 이후 달라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 안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뭐라도 만들어내고 싶고, 잘하고 싶고, 괜찮은 척 말고 진짜 괜찮아지고 싶었다.
출산휴가 3개월이 끝나고 직장에 복직했다. 직장인으로 9시부터 6시까지 살다가 퇴근 후에는 엄마로 살았고, 아이들이 잠든 뒤 졸린 눈을 비비며 책상 앞에 앉았다. 그래도 너무 졸리면 노트북을 들고 집 앞 카페로 갔다. 직장일과 육아만 하다가 오십이 되고 육십이 되면 너무 억울하고 후회만 남을 것 같았다. 뭐가 달라질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무작정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도망치고 싶어서가 아니라 도망치지 않으려고 말이다. 일기장처럼 책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블로그에 글이 조금씩 쌓였다. 여전히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지 못했지만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워갔다.
그렇게 차곡차곡 글을 쌓여가던 2019년 여름, 문학/책 분야의 ‘이 달의 블로그’에 선정되었다. 블로그 이웃이 늘기 시작했다. 포털사이트 메인에 내가 쓴 서평이 게시되기도 했고, 블로그에 찾아왔던 분들이 이웃을 맺고, 댓글을 남겨주었다.
‘아, 책 읽는 걸로 무언가를 해볼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동안 써둔 서평을 모아 브런치 작가에 도전했고, 신청한 지 하루 만에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그다음에는 도서 전문 인플루언서가 되었다. 모두 2019년 여름부터 2020년 가을까지 1년 사이 일어난 일이었다. 독서 모임을 꾸린 것도 그즈음이었다.
혼자 하는 일이라고만 생각하던 책 읽기를 누군가와 함께 하기로 결정하고 진행자가 되어 직접 운영하기로 마음먹었지만 걱정이 앞섰다. 브런치 작가나 인플루언서라는 자격은 어디까지나 나의 만족일 뿐 누가 알아줄 것 같지 않았다. 등단 작가도 아니고 이름 없는 누군가가 내미는 손을 잡아줄 사람이 있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오래 망설였다. 그러나 결과보다 과정을 생각하기로 했다.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두려움을 용기로 바꿔나갔다.
2020년 5월, 독서 모임을 위한 모집 글을 올리고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모집 인원이 마감되었다. 그날 나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모집 인원이 모두 채워졌다는 결과 때문이 아니라 이때까지 천천히 걸어왔던 지난 시간의 과정이 떠올랐다. 그 과정들을 지나면서 ‘나도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를 명확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나 자신이 믿음직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막막해’, ‘힘들어’, ‘육아 때문에 미치겠어’, ‘나는 어디 있지?’, ‘나는 누구지?’, ‘내 꿈은?’하고 불안해하며 힘든 시간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면 지금부터 딱 3년만 꾸준히 본인이 하고 싶은 닐, 좋아하는 일을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3년이면 충분하다. 나는 좀 느린 사람이라 3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지만,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당신은 2년, 아니 1년 안에도 변화를 경험할 거라고 확신한다. 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도망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도망치지 않고 부딪치다 보면 또 다른 길이 보일 거라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물론 그 길에도 장애물이 많겠지만 그것마저 기회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올 거라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