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목요일그녀 Oct 08. 2022

좋아하는 일을 본캐가 아닌 부캐로

엄마로, 아내로, 직장인으로 쳇바퀴 돌 듯 사는 삶이 본캐가 될 줄 몰랐다. 어른이 된 이후의 삶을 상상할 때마다 소설가의 나를 떠올렸다. 꼭 소설가가 되지 못하더라도 주어진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삶이 내게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 이전과 전혀 다른 세계에 발을 들였다는 걸 알았다. 엉덩이를 붙일 시간이 생기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소설 쓰기는 일상에서 멀어졌다. 너무 쓰고 싶은 날엔  혼자 안지도 못하는 아이를 업고 소리 내서 소설을 읽었다. 소설을 읽는다고 그 시간이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지금 뭐 하고 있지’ 하는 생각 때문에 자주 우울해졌다. ‘아이가 없었다면 지금도 쓸 수 있을 텐데.’ 불평하느라 현실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직장인으로의 삶 역시 다르지 않았다. 월급을 받는 일은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없었다. 야근도 많았고, 책임져야 할 일도 많았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애정이 있었지만 육아와 일을 병행해야 하는 삶은 매일 힘들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아이를 양육하며 일을 지속하는 것에 대한 고민은 큰 아이가 초등학생이 될 때까지 계속됐다. 그럼에도 끝까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지켜내고 싶은 마음과, 그냥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부딪치며 혼란스러웠다. 

아이, 일, 꿈, 모든 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아이가 자라면서 ‘엄마’라는 역할을 자연스럽게 우선순위에 두게 되었다. 소설로 가득했던 독서 리스트에 육아서가 끼어들기 시작했다.     

 

육아서 속에는 비슷한 고민을 하는 엄마들의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에 못지않게 엄마를 채근하는 말도 많았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는 말이 육아서에서 가장 많이 본 문장이었다. ‘엄마인 당신이 먼저 행복해져라.’ ‘당신을 찾아라.’ ‘당신의 마음을 지켜라.’처럼 엄마의 행복과 아이의 행복을 동일시하는 문장들이 어느 순간부터 불편하게 느껴졌다.     

 

육아는 좋아하는 일보다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는 책임에 가까웠다. 의무와 책임으로 가득 찬 일상은 즐거운 마음보다 긴장된 상태일 때가 많았다. 혹시 나의 부주의로 아이가 다칠까 봐, 집안일에 신경 쓰느라 미처 처리하지 못하고 퇴근하는 일이 있을까 봐, 내가 늦으면 아이를 돌보는 엄마가 힘들까 봐 늘 바쁘게 움직였다.      

육아를 하며 쌓인 불편한 마음의 근원이 뭘까 궁금해져서 인문서를, 심리학서를, 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이해가 안 돼도 읽었다. 그렇게 일 년 남짓의 시간이 지나자 내가 변하는 걸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소설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는데, 그걸 놓아버리면 나를 잃어버릴 것 같아 두려웠는데 책을 읽고 서평을 쓰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이, 잘할 수 있는 일이 소설을 쓰는 게 아니라 다른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방치된 블로그에 일기 쓰듯 한 권 한 권 서평을 쓰기 시작했다. 기억하고 싶어 적다 보니 한 권 한 권 쌓였다.      


출처 : 픽사베이


일 년 일 년 글을 쌓아 가다 보니 어느새 천 편에 가까운 서평이 블로그에 쌓였다. 지난 몇 년을 돌아보니 매년 150권 이상을 책을 읽고 서평을 썼다. 그 사이 천명도 안 되던 블로그 이웃이 지금은 6천 명이 넘었고, 이웃 분들이 추천해 주는 이달의 블로그에도 2년 연속 선정되었다.      


‘엄마’라는, ‘직장인’이라는 본캐를 포기하지 않고도 ‘나’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육아와 직장생활이 ‘내 삶을 갉아먹을 거야.’ 생각하며 지쳤던 날들에서 이젠 퇴근 후, 육아 후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게 좋았다. 일상을 지치지 않고 살아갈 힘이 돼 주었다.      


우리는 대부분 쉽게 ‘본캐’로의 삶을 놓을 수 없으니까, 매일 비슷한 일상 사이에 좋아하는 일을 ‘부캐’로 끼워 넣어보면 어떨까?      


만약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라는 생각이 든다면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생각하는 일, 많이 하는 말을 떠올려 보자.      


그림을 그리는 일이든, 필사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든, 책을 읽는 일이든 뭐든 좋다. 

그 일을 떠올렸을 때 설렌다면 충분하다. 그리고 실제로 해냈을 때 얼마나 좋을지 상상해 보고, 도전해 보자. 

익숙한 일보다 가끔은 새로운 일을 시도해 보면 좋겠다. 처음 시작이 어렵다고,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놓지 말고 계속 해보길 바란다. 당장은 아닐지 몰라도 그 시간들이 쌓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하고 있는 자신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림책을 만드는 유준재 작가는 두려움과 설렘이 같은 단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제가 가장 많이 곱씹는 단어가 두려움이에요. 두려움이 없으면 창작이 안 되는 것 같거든요. 새 작품에 들어 갈 때마다 ‘잘할 수 있을까? 망치면 어쩌지? 앞으로 얼마나 더 일할 수 있을까?’ 긴장되고 무서워요. 두려우니까 계속 귀와 눈을 열고 열심히 두리번거리며 찾는 거예요. 그러다 ‘어? 혹시 이렇게 하면 될까?’ 싶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두려움 속에서 설렘이 피어나요.
-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한겨레출판, 2021      


무언가를 시도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두려움보다는 설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 덜컥 시작하고 난 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푹 빠져 보는 일, 그 경험치가 쌓이고 쌓이면 본인만의 무기가 만들어질 거다. 그 무기가 일상을 살아가는데 든든한 힘이 되어 줄 거라고 나는 이제 믿는다. 경험만큼 확실한 건 없으니까. 


지금 눈앞에 뭐가 있는지 한 번 둘러보시라. 혹시 보이는 것들 중 손을 대고 싶은 게 있는지도 생각해 보고. 

딱 거기서부터 시작 해보면 어떨까. 하루 중 좋아하는 일로 보내는 단 몇 분, 몇 시간을 만들어 채워가는 기쁨을 함께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이전 09화 좋아하는 일을 계속 만들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