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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일그녀 Oct 19. 2019

힘들 땐 시를 읽었다

17년 차 직장인. 

그것도 같은 직장에서 같은 업무를 담당하며 보낸 시간이다. 

아이 낳기 전 9년, 아이를 낳고 8년 비슷한 기간이지만 아이를 낳기 전과 낳은 후의 직장생활이 같은 수는 없었다.    

  

결혼 전에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야근이 뭐 대수야, 하는 마음이었다. 아니, 오히려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퇴근하는 것보다는 늦더라도 마무리를 하고 퇴근해야 마음이 편했다. 

늦게까지 남아 일하는 게 어쩐지 열심히 일하는 직원 같아서, 상사들의 눈에도 좋게 보일 것 같아서 일부러 늦게 남아 일을 한 적도 많았다.     

 

그렇지만 아이가 태어난 뒤에는

퇴근 시간을 지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졌고, 일이 몰려 야근을 해야 하는 날에는 아침부터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퇴근이 늦어지면 둘째를 돌봐주는 친정엄마의 육아 퇴근이 늦어지고, 엄마가 언제나 오나 학원에서 기다리고 있을 첫째 아이의 모습이 눈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내가 하는 일하는 곳이 교육기관이다 보니 가끔 주변 사람들이 물었다. 

“학교 방학했는데 그럼 좀 한가하겠네?”    

 

하하, 그럴 리가요. 

대학마다 다르지만(방학 때 단축근무를 하는 대학도 있다). 내가 다니는 곳은 단축근무 같은 거 없다. 방학이면 다음 학기 개강 준비로, 학기 중 마무리하지 못한 업무 처리로 더 바쁘면 바빴지 한가해지지 않았다.      


내가 다니는 대학의 학생들이 방학을 했다는 건, 어린이집에 다니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내 아이들도 방학을 했다는 말이다.     

 

일하는 엄마에게 ‘방학’은 그 무엇보다 두려운 기간이지 않을까. 

방학 전부터 고민이 시작됐다. 

예윤이는 돌봄을 다니기는 하지만 방학 중엔 9시부터 2시까지만 있을 수 있어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결국 아이는 학원을 하나 더 늘렸다. 

물론 아이의 의사를 묻고, 아이가 다니고 싶다고 하는 학원을 선택했지만, 

어쩌면 아이 입장에서는 선택지가 별로 없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엄마인 나로서도 그리 다른 선택지가 없었지만.      


교육열이 높아서, 아이가 뭐든 잘하기를 바라서, 남들 하는 거 다 시켜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엄마가 돌아오는 시간까지 아이가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게 할 수 없어 선택한 일인지라 엄마인 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엄마가 올 때까지 어린이 집에서, 유치원에서, 학원에서 기다리는 게 일상이 된 아이는 싫은 내색을 하면서도 결국 그 생활에 적응해나갔다.      


그렇다고 여덟 살 아이의 마음으로 그 모든 상황이 온전히 이해되거나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이는 아침이면 자주 눈물을 보였다. 


엄마, 

엄마가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엄마, 

엄마,      


우리는 매일 아침 헤어짐 인사가 길다. 

우리는 매일 아침 한 편의 詩처럼 헤어지고, 매일 저녁 한 편의 詩처럼 만난다. 

길게 설명하지 않는, 설명할 수 없는 인사로.     


워킹맘 8년 차. 어린이집, 유치원을 다닐 때마다 고비가 많았지만, 잘 버텼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지난 7년의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싶을 만큼 힘들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3개월 동안 매일매일 아이는 학교에 가기 싫은 이유가 너무나도 많지만, 그 많은 이유 중 나를 가장 아프게 하는 건 엄마와 헤어짐이 싫다는 아이의 한 마디.      


“엄마는 왜 매일 일을 해야 해? 다른 엄마들처럼 나 끝나면 학교로 데리러 오면 안 돼?”

라고 묻는 아이에게 뭐라고 답해도 아이의 마음을 위로할 길이 없어 보여 나는 늘 대답 대신 아이를 꽉 끌어안는다.           


「보통의 맞벌이 부부가 그러하듯이 나의 부모도 출근하기 전

에 내게 인형을 쥐어주었다. 나는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알았으

므로 종일 실밥이 풀린 것처럼 외로웠다. 

조해주  시집  『우리 다른 이야기 하자』 중 <미미> 부분」     


나는 아이의 외로움을, 

아이는 나의 외로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보통의 맞벌이 부부가 그러하듯이 아이에게 인형처럼 들려준 휴대폰이 엄마가 보고 싶은 아이의 마음을 위로하기엔 너무 딱딱하기만 하다. 그건 가짜. 

하교 후에, 학원으로 오가는 길에 전화기 너머로 속삭이는 다정한 안부에도 우리는 종일 그리워한다.  

   

서로의 하루를 열심히 살아 낸 뒤에 만나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하루 종일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전하느라 잠시도 떨어지지 아이.

퇴근 후 바로 육아 출근으로 종종 예민해지는 나.

서로의 온도가 어긋날 때조차, 애틋함으로 서로를 끌어안아야 할 만큼 함께할 시간이 간절하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토닥토닥 끌어안고 아이를 재운 뒤,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 시집 한 권을 펼쳐 읽을 때, 아, 오늘도 우리는 時처럼 살아 냈구나 싶어 안도한다. 다정한 詩 한 구절에 위로받는다.     


내일도 우리의 아침 헤어짐 인사는 길고 외롭겠지만, 서로의 외로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또 안다. 그렇게 하루하루 함께 잘 살아 낼 거라는 것을.      


그렇게 우리의 時 한 편을 완성해 낼 것이라는 것을.      


그러니 믿자. 

오늘의 나를, 오늘의 아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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