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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일그녀 Nov 04. 2019

아이에게 '욱' 하는 순간에도 아이를 사랑하고 있었다

                                

"엄마! 생각 좀 하고 말해줄래?"


이제 여덟 살인 첫째 아이 예윤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오랜만에 네 식구 나들이를 계획했던 날이라 새벽부터 일어나 분주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졸음이 덜 깨서 이불속에서 좀처럼 나오지 못하는 아이에게


"윤아, 얼른 일어나!"라고 던진 말에 되돌아온 말이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욱해서 "뭐라고? 지금 뭐라고 말했어? 응?" 큰 소리를 내고 말했다. 


"엄마, 지금 봐봐. 채민이가(18개월 둘째) 지금 나를 누르고 있잖아. 안 보여?" 하며 

채민이를 옆으로 툭, 밀치고 일어나는 아이. 


그 순간(별 것 아닐지도 모르지만) 아, 정말 밉다. 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잘못했네~라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고, 그래, 그랬구나 하고 웃어넘길 수 있는 일이었는데 나는 왜 욱, 하고 말았을까. 왜 그깟 일로 아이가 미워 보였을까. 


아니다,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이지만 아이가 미운 순간은 생각보다 많다. 

특별히 아이가 잘못하지 않은 순간에도, 별 말 아닌 것에도, 그냥 밉다, 싶은 순간은 찾아왔다.                                               

사진 출처 : 픽사 베이 

                                              

"엄마, 나 사랑해?"


동생이 생긴 뒤로 예윤이가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다. 

때론 정성스럽게, 자주 건성건성 "으응, 사랑하지 그럼."하고 대답해놓곤 바로 후회한다. 

꼬옥 안아주면서 말해줄걸, 하고. 


미워하는 마음도 비슷했다. 

그런 생각이 든 뒤에 늘 후회한다.

엄마의 그 감정을 날 것 그대로 아이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자신도 모르게 "엄마는 너 미워!"하고 말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주워 담을 수 없는 말. 


아이의 놀란 얼굴. 그렁그렁한 눈물. 이미 시작된 엄마의 후회. 


인정하자. 

아이는 자주 엄마를 미치게 한다. 


커갈수록 따박따박 대답하는 말에 기가 차기도 하고, "쫌! 엄마 말 좀 들어!"하고 빽 소리 지르고 싶은 순간도 생각보다 자주 찾아온다. 

아이에게 소리라도 지르지 않으면 엄마인 내가 미쳐버리고 말 것 같은 위기의 순간도 온다. 


조금만 마음을 열고 생각해보면 


'밉다'는 그 감정에도 '내가 사랑하는 아이'라는 전제 조건이 깔려 있다. 


사랑해도 미울 수 있다. 하루 종일 엄마를 미치게 한 아이도, 매일 싸우자고 덤벼드는 듯 한 아이도, 밥을 안 먹어서, 너무 땡깡이 심해서, 도통 말을 안 들어서, 잠투정이 심해서 등등 미운 이유는 수십 가지 어쩌면 수백 가지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아이를 사랑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내 아이'이기 때문에. 


그림책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를 읽다 보면 울컥,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너를 사랑해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 어떤 일이 닥쳐도
내가 살아 있는 한
너는 늘 나의 귀여운 아기                                               

                                                                                                                                                            

이 책은, 아이가 태어나서 유년기를 거치고, 소년기를 거치고, 청년이 되고, 성인이 될 때까지 엄마가 자신의 아이에게 느낀 감정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잠든 아이의 머리맡에 앉아 아이를 안아주거나, 토닥이면서 '사랑해 나의 귀여운 아기'라고 말하는 장면은 매 장면마다 감정이입이 되면서 마음을 움직였다.


아이에게 '욱' 한다고 해서 아이를 진짜 미워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안다. 엄마들은 안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 걸 받아들일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거나, "왜 엄마는 이렇게 오락가락 하지?"하고 생각한다. 


예윤이는 잘 웃다가도 내가 순간 욱하거나, 목소리가 커지면 단번에 이렇게 말한다. 


"엄마, 엄마 지금은 나를 사랑하지 않지?"라고. 그럴 때면 또 마음이 쿵. 


부모교육을 받다가 들었던 이야기 중에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었다. 


"어떤 엄마를 만나도 아이들은 자란다. 우리가 날씨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살아가듯이 아이들은 뜨거운 엄마, 차가운 엄마 밑에서 그게 차가운지 뜨거운지 모르고 살아간다. 결국 엄마의 성격이 아이의 날씨가 된다. 아이의 입장에서 엄마가 봄, 가을 날씨일 때는 많지 않다. 자연은 바꿀 수 없겠지만 엄마의 날씨는 바꿀 수 있다. 엄마가 한이 있으면, 정이 부족하면, 배려를 받지 못하면 엄마의 날씨가 좋지 않다. 엄마의 한이 치료돼야, 엄마가 배려받아야 엄마의 날씨가 변할 수 있다."                                               


                                                                                                                                                        

'멜리에게는 엄마가 둘이다'로 시작되는 소설. 


멜리의 엄마는 시시때때로 변한다. 한없이 좋은 엄마였다가, 한순간에 날카롭고 두려운 엄마로. 멜리는 엄마의 변화를 온몸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엄마가 심술쟁이 검은빛으로 변해버리면 그저 기다리면 된다는 걸. 그러면 다시 언젠가 분홍빛으로 돌아온다는 걸. 


그러는 사이 멜리는 조금씩 상처 받고, 어둡고, 자존감 약한 아이로 변해간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큰 맘먹고 고백한 친구와 외할머니조차 멜리의 말을 좀처럼 믿어주지 않는다. 이제 멜리에게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결국 점점 더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멜리. 


멜리의 엄마는 자기 스스로 사랑받지 못해, 아이에게 어떤 사랑을 주어야 할지 잘 몰랐다. 다만 자신의 감정에 따라 천사 같은 엄마였다가, 악마 같은 엄마로 순식간에 변해버린다. 그러면서도 그것조차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듯하다. 


멜리는 엄마가 자신에게 나쁘게 대하는 게, 모두 자기 탓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고 그러면 그럴수록 두려움과, 불안, 분노에 휩싸인다. 이제 모두 엄마가 아닌 멜리가 정신병에 걸렸다고 생각한다. 


멜라는 고작 열세 살 여자아이였을 뿐이다. 모든 걸 자기 탓으로 돌리기엔 한없이 예쁘고, 사랑과 보살핌을 듬뿍 받아야 하는 아이. 그 아이의 마음은 누구도 들여다 봐 주지 않았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두려웠던 건, 혹시 내가 내 아이에게 내 기분에 따라 감정을 전달했던 건 아니었는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일에 지쳐서 피곤한 날, 괜스레 울적한 날엔 사소한 것에도 버럭 하진 않았는지, 기분이 좋은 날엔 아이에게도 한껏 들뜬상태로 아이를 대하지는 않았는지. 

어쩐지 꼭 그랬던 것만 같다. 


나는 어떤 엄마일까. 

나는 안다. 완벽한 엄마가 될 수 없다는 걸. 

그렇지만 조금만 노력하면 그럭저럭 괜찮은 엄마는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노력이라는 게 너무 힘들다는 것도 안다)


아이에게 '욱'하고 나서 뒤돌다 생각해보면 별 것 아닌 일이 더 많았다. 

다정한 눈빛으로, 목소리로 충분히 말할 수 있었을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순간의 내 컨디션에 따라 목소리가 달라지거나 눈빛이 달라졌다. 그리고 아이는 그걸 그대로 받다 들였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나의 상처를 되짚어 보는 일이 많다. 그리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엄마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으면 그 상처 그대로 아이에게 다시 전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안 그러려고 해도 엄마가 아는 감정이 그것이기 때문에 표현할 수 있는 다른 방법 찾는 일을 쉽게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너무 자책할 필요도 없다. 그래도 아직은 되돌릴 시간이 충분하니까. 

'욱'할 것 같은 순간에 잠깐 스톱! 을 속으로 외쳐보자. 잠깐이면 된다. 

분홍분홍 엄마로 돌아올 수 있는 시간은 그 짧은 순간이면 충분하다. 


소설의 마지막은 희망적이다. 

엄마와 아이가 화해하고, 서로 다시 사랑하는 뻔한 해피엔딩은 아니다. 

멜리가 자신의 고통을 스스로 털고 일어나려는 희망이다. 아이에서 소녀가 되어가는 과정의 시작. 


- 멜리처럼 '엄마의 병' 때문에 고통받는 다면, 속이 뒤틀리고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고통스러운 구역질이 나게 된다. 하지만 이 병을 치유할 길은 멀고도 멀다. 왜냐하면 엄마는 변하지 않을 테니까. 헤쳐 나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쪽은 오히려 상처 받은 아이이다. 그뿐이다. 하지만 그 길은 어마어마하다. 끝없는 바다처럼 망망하고 엄청나면서도 생생하니까.-


위의 작가의 말은, 이 소설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어 쓰였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상처 받은 아이가 어떻게 세상을 헤쳐나가야 하는지, 스스로 일어나야 하는지 소설의 마지막에서 작가는 열린 결말로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엄마'의 입장을 자꾸 헤아려보게 된다. 엄마도 변할 수 있지 않을까. 엄마 역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말이지, 하는 생각 같은. 


그래서 엄마와 딸(멜리)이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결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책을 덮고, 아이의 웃는 얼굴을 본다. 마음 한쪽이 찌릿하다. 


나는 아이의 저 웃는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주고 싶다. 


마음이 힘든 엄마들,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건 아닐까 짐작하면서도 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엄마들에게 슬쩍, 이 책을 건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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