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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일그녀 Nov 04. 2019

부부 사이 괜히 '억울' 해질 때

                                       

같이 사는 남자에게 지난겨울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겨울 스포츠의 상징 '스키'


왕년에 '보드' 좀 탔던 그는 결혼과 아내의 출산 육아 등등의 이유로 잠시 스키장을 떠나 있었다. 

여덟 살이 된 큰 딸, 당시 10개월에 접어든 둘째 딸을 두고 그는 나만큼이나 힘든 육아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은근슬쩍 '다시 스키장에 가볼까 봐'라는 그의 말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러라고 부추긴 건 나였다. 


엄마인 '나' 뿐 아니라 아빠인 '그'에게도 육아 스트레스가 없을 리 없었다. 

적당히 취미를 즐기는 게 그를 위해서도 우리 가족을 위해서도 이로울 거라는 판단과, 그에 대한 나름의 애정 어린 배려였다. 


스키 동호회에 가입을 하고, 반차를 내거나 조퇴를 하고 평일에 스키장을 한두 번 다녀오더니 그 이후엔 일주일에 한 번은 퇴근 후 스키 모임(당연히 스키장)에 갔다 새벽에야 귀가했다. 그 사이 두 아이 픽업, 저녁 먹이기, 씻기기, 재우기, 집안 청소까지 모두 내 몫이었지만(나도 직장인이다!), 일주일에 하루, 이틀쯤이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나의 마음에 살짝 균열이 생기고 말았다.                                               

사진 출처 : 픽사 베이

"이왕 시작한 거, 매번 장비 빌리는 거보다 사는 게 낫겠어."

"그래. 그것도 괜찮겠네(나는 어리석었다). 그런데 얼마야? (이미 구입한 뒤였다)"

"아, 그게... 더 비싼 것도 있지만, 나는 이월 상품으로... 40프로 할인을 받아서......"


몇 번의 대화가 오고 간 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금액이 백만 원이 넘는다는 걸 알게 됐다. 

처음엔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자 뭔가 마음속이 이상했다. 

'백만 원? 나는 가계부를 쓰니, 냉장고 파먹기를 하니 하면서 생활비 아끼겠다고 아등바등인데, 같이 사는 남자는 취미활동에 턱턱 백만 원을 쓰는구나' 싶은 마음이었겠지.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취미'로 시작된 문제는 경제권 분리, 육아시간, 집안일 등등으로 번져나가 내 마음속이 지옥이 되기 시작했다. 


결혼하면서부터 각자 관리해온 월급. 내 자식들인데 내가 좀 더 하면 어때 했던 마음들이 마치 내가 다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지고, 억울해지기 시작한 것.


대부분의 감정싸움은 사소한 것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그때그때 풀지 않으면 어디로 어떻게 튈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한쪽의 일방적인 억울함과 서운함은 두 사람의 관계에 이로울 것이 전혀 없다. 


겉으로는 표현도 못 하고(잘해보라고 등 떠민 건 나였으니, 어쩐지 소심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끙끙 앓다가 전에 읽었던 몇 권의 책을 다시 펼쳤다. 책 속으로 숨어 들어가 잠시 숨을 고른다. 


『어쩌자고 결혼했을까 오카다 다카시 2017 』, 『감정 수업 강신주 2013 』,  『다시 태어나다 수전 손택 』                                               



                                        

철학을 전공하다 의대에 들어가 정신과 의사가 된 저자가 쓴 『어쩌자고 결혼했을까 오카다 다카시 2017 』는 '상처 받은 사랑을 위한 처방전'이다. 



〈1부 - 이러려고 결혼한 게 아닌데 / 2부 - 남편이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 3부 - 사랑과 인생을 되찾은 아내들 / 4부 - 사랑도 가족도 새로운 형태가 필요하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야기는 딱 들어맞는 '처방전'이라기보다는 '아, 이런 사례도 있구나, 이런 부부도 있구나'하는 정도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정도였지만 이상하게  책 속에 소개된 스물한 가지의 사례들 중 몇 개의 이야기들은 순간순간 떠올랐다. 



대부분의 부부관계는 '사랑'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랑이 변질되는 것은 아니지만 부부로 사는 세월만큼 변화는 한다. 

때로는 그 시간들 사이에서 극복하지 못하기도 하도, 꾸역꾸역 억지로 틈을 메우며 살기도 하고, 운 좋게 적당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선택은 부부 각 개개인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이 그들 모두에게 가장 최선이었을 거라고 믿길 바란다. 


다만, 같이 사는 동안 소모적인 감정싸움으로 자신의 자존감을 낮추고, 쓸데없이 없어도 될 우울증 같은 병을 얻게 되는 일만은 없길 바란다. 


「지배나 통제할 때 관계의 주도권은 지배하는 쪽에 있지만, 사랑할 때 관계의 주도권은 상대방에게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 생각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만 사랑하는 사람은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유형의 사람은 사랑하다는 것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상대방을 통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159」


「무심코 분노를 표출하는 상황이 계속될 때, 이대로 그 사람을 잃을 때까지 괴롭히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상대방의 협력과 배려가 필요할 뿐, 상대방을 잃고 싶지는 않은 것인지 자기 자신에게 잘 물어봐야 한다. 자신을 좀 더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상대방에게 주먹을 휘둘러봤자 원하지 않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다. 사랑을 간절히 원하는데 사랑받지 못했다고 해서 상대방을 괴롭히고 분노를 터뜨리면 진정 바라는 것은 더 멀어질 뿐이다. 바로 이런 순간,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자신의 입장만 내세울 게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서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게 되고, 상대방의 사정이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p168」


                                              

                                       

이 책을 처음 만난 건 2013년에서 2014년으로 넘어가는 추위가 절정이던 겨울이었다. 


그때 첫아이는 두 돌을 앞두고 있었고, 나는 직장에서 갑자기 늘어난 업무로 인해 육아와 일에 치일 대로 치이던 중이었다. 


그때까지도 한 아이의 아빠, 남편이 아닌 자유로움을 추구하던 같이 사는 남자로 인해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그야말로 감정의 낭떠러지를 경험하고 있었다.  혼자 몰래 동사무소에 가서 이혼 신고서를 가지고 와 다이어리 사이에 끼어두기도 했다. 그때 마음을 다잡게, 조금 더 다른 시작으로 '관계'를 들여다보게 해 준 이야기들이 이 책 속에 담겨 있었다. 


이 책의 부재는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이다. 


질투, 미움, 의심, 두려움, 겁, 확신 등등에 대한 감정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글들을 통해 당시 내 마음을 치유받았다. 아니, 치유라기보다는 위로받았다는 게 맞을 것이다. 내가 틀린 게 아니라는 위로, 잘하고 있다는  따뜻한 격려. 그때 주변의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위로받지 못했던 마음들을 책을 통해 받았다. 


「항상 떠날 준비를 하라! 상대방에 대해 항상 자유로워라! 이것만큼 상대방이 나에게 무관심해지거나 심드렁해지지 않도록 만드는 확실한 방법도 없다. 떠날 수도 있고 머물 수도 있는 사람만이 누군가의 곁에 머물 수가 있다. 

...

상대방은 자신에 대한 나의 헌신이 나의 자유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나는 상대방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어야만 하고, 

또 상대방이 그런 사실을 잊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 때에만 상대방은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고, 동시에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면 내게 기쁨을 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


상대방에게 철저하게 헌신하는 것으로 사랑이 지속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역효과만 생길 뿐이다. 

내가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한다고 상대방이 생각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나의 내면을 섬세하게

읽으려는 노력을 접을 것이고, 그만큼 나에 대한 사랑도 식을 테니까 말이다(p56) 」



이 문장을 통해 나는, 내가 선택한 이 관계에서 떠나든 남든, 희생하든 아니든 그 모든 것은 '나의 '선택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절망도 의심도 불안도 필요 없이 '나'를 지키면 될 일이라도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와의 가벼운 싸움 없이도, 이혼 신고서를 다이어리 사이에 끼워 둔 채로 그렇게 그 겨울을 보냈다. 


                                              

                                   

위의 책들을 통해 위로받거나, 공감했다면 이 책 『다시 태어나다』를 통해서는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흔한 말로 팩폭(팩트 폭격)이랄까.


1947년부터 1963년까지의 수전 손택이 쓴 일기와, 노트 속 은밀한 기록들을 그녀의 아들이 다시 엮어 낸 책이다. 사춘기 시절부터 30대 초반의 저자가 가진 고민과 사랑, 결혼과 이별, 끊임없는 욕망, 열정.... 에 대해 스스로 기록한 짧거나 혹은 긴 독백들이 읽는 동안 내내 나를 붙잡았다. 



「결혼을 발명한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그 사람은 천재적인 고문기술자였다. 결혼은 감정을 무디게 만들려고 작정한 관습이다. 결혼의 핵심은 반복이다. 그 최상의 목적은 강한 상호 의존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말다툼은 항상 그걸 행동으로 옮기려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결국 소용없어진다. 그러니까, 결혼 생활을 끝낼 준비 말이다. 그러므로 한 해가 지나고 나면 말다툼 후 “화해하는 것 ”을 그만두게 된다. 그저 분노에 찬 침묵 속으로 빠져들게 되고, 이는 다시 보통의 침묵으로 이어지며, 그러고 나서는 또다시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1956 년 / p114)」


「의무, 책임. 내게 이런 말들은 무거운 의미를 띤다. 그러나 내가 의무를 진다는 사실을 인정해 버리면, 도리 없이 그런 의무들을 내 경향성과 상충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건 아닐까? 의무를 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구체적인 의무의 내용은 잘 모르는 게 가능할까? 수행하지 않으면서도 그 의무들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을까?(1958 년 / p226)」


「결혼은 부부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암묵적인 사냥이다. 온 세상이 짝을 짓고 쌍쌍이 작은 집에서 살면서 소소한 흥밋거리를 구경하고 자기네들만의 사생활 속에서 안달복달하며 사는 것 – 그건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일이다. 결혼한 부부들의 배타적 사랑은 파괴되어야 한다.(1958 년 / p244)」



「결혼에 붙이는 주석 : 결혼과 가정생활 전체는 흔히 (동방정교회 ) 수도원 생활에 비견되는 수련이다. 둘 다 인격의 날카로운 모를 깎아 무디게 만든다. 파도치는 바닷물에 자갈돌이 쓸려 서로 스치다 보면 결국은 매끈해지는 것처럼 (1960 년 / p302)」



결혼 9년 차(연애 기간 7년을 포함하면 16년 차) 부부에게 때론 가벼운 말다툼보다 '무관심'이 더 위험한 신호임을 순간순간 느낀다. 아이들 때문에 그의 감정까지 돌볼 겨를이 없다는 핑계로, 다 큰 어른이 뭘 그렇게 봐 달라도 아우성이냐고, 나도 힘들다고, 제발 각자 알아서 좀 잘하자고 마음속으로 열두 번도 더 외친 말을 다행히 아직은 밖으로 내뱉은 적은 없다. 


나 역시 종종 나에게는 별 관심 없어 보이는 그이 사소한 말투나 행동에 상처 받고, 감정이 상하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그 순간 '억울함'이 시작된다. 



'엄마들(아내들)'이 느끼는 비슷한 감정의 지점이 아닐까. 


'왜! 나는 이렇게 버둥거리면서 바쁜데 이렇게 몰라주지? 왜! 늘 나만 괜찮은 척해야 하지? 왜! 나만 힘든 거 같지?' 같은 참았던(괜찮은 것 같았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툭~ 하고 터진다. 걷잡을 수 없이. 



그때 그 감정을 어떻게 넘기느냐가 중요하다. 

터지는 대로 터트릴 것인가, 숨 한 번 크게 쉬고 꿀꺽 삼켜버릴 것인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선택이 '나'의 선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는 것도, 터트리는 것도. 

그리고 그다음에 일어날 수 있을 싸움이나, 오랜 냉전, 혹은 상처 같은 것들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을 자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은 필수다. 


아이 때문에, 생활 때문에,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같은 그럴싸한 핑계 말고 오롯이 '나'를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자존감'을 길러야 한다. 




덧붙임. 


이 글은 올겨울 써 둔 글이었는데, 그 시기를 잘 지나고 나니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에 그가 다시 새로운 취미 '음악 감상'을 시작하면서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음악 감상이라는 게 뭐? 할 수도 있지만, 진짜 음악 감상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오디오와 스피커에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 나도 그를 통해 알게 되었다.(대체하는 취미마다 어찌나 고가의 장비가 필요한 것인지). 물론 그때만큼 감정이 상하거나, 불편하지 않다. 


그 사이 쌓인 내공 덕이기도 하고, 나와 그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게 된 긍정적인 변화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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