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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솜 Apr 22. 2024

너무나도 그리운 그 집

도시 근대 한옥

성안에 집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고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처음 마을이 생길 때는 다른 집들도 기와를 올린 한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새집들은 양옥으로 지어졌고 어느 집은 2층이어서 나에게는 마치 대궐같이 보였다. 내가 기억하는 우리 집은 아직 한옥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서 10년을 살았다. 


집들은 변했지만 동네가 지금도 남아 있다. 같은 동네에서 자란 남편과 가끔 돌아보는 소중한 장소다.


우리 집은 대문이 큰길에, 담장이 골목으로 접해 있는 코너집이었다. 큰길에서 대문으로 들어가면 안채는 ㄱ자형 한옥이고, 한참 후에 지어진 골목 쪽에 접한 건물은 현대식 양옥이었다. 안채 한옥은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안방과 건넌방 1, 건넌방 2  안방 아래 부엌, 부엌 아래 다시 방이 있었다.    

  

안방은 아버지 어머니께서 건넌방은 우리들이 사용했는데 오빠 이외에 모두 딸이어서 두 개의 건넌방은 딸들의 방이었다. 안방 아래는 부엌이었고 부엌 아래 다시 방이 있었다. 이 방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오빠방이었다. 삼촌이나 다른 친척이 오면 함께 자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세를 주어 아주 남이 살기도 하였다. 방 아래는 본 건물과 분리된 변소가 있었다.  

         

한옥은 마당과 마루 부엌의 높이에 차이가 있다. 우리 집도 마루는 마당에서 두 단 정도 올라가고 부엌은 마당보다 두 단 정도 내려갔다. 한옥의 마당은 필요에 따라 기능이 달랐다. 명절이나 제사와 같은 큰일이 있으면 석유난로를 놓고 전을 부치며 사람들로 북적였고, 김장날은 절여놓은 배추와 양념 통으로 가득했다. 엄마 말씀이 마당에서 닭을 키워 계란도 파셨다고 하니 처음에는 마당이 꽤 넓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집을 떠나기 한 두해 전 마당 한쪽에 번듯한 양옥 건물을 지었다. 마당은 좁아졌고 이제는 안채라고 불리게 된 한옥 건물은 녹기 시작한 아이스크림 같이 보였다. 하늘이 보이는 우리의 놀이터 마당 공간이 좁아졌다. 대문을 들어서면 새로 지은 양옥이 떡하니 보였고 빨랫줄에 거려진 안채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안채와 새로 지은 양옥을 합해 우리 집은 마당을 중심으로 ㄷ자형 집이 되었다. 각 건물은 마당 쪽으로 길게 툇마루가 있어 어디서건 걸터앉아 마당을 볼 수 있었다. 새 건물은 세를 주었다. 우리가 주인이었지만 마당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오로시 우리 가족들만의 공간이었는데....

         



우리 가족 8명에 아버지 형제들도 많아 집은 항상 북적였다. 제사나 명절을 함께 지내야 했고, 시골에서 일가친척이 올라오면 우리 집에 머물렀다. 엄마가 말씀하시길 매일매일 삼시세끼 10 식구 이상의 밥을 해야 했다고 한다. 한옥은 겨울에 특히 불편했다. 부엌이 밖에 있어 상을 들고 부엌과 마루를 오르내려야 했다. 대청마루는 밖의 공기를 막을 벽이 없어 매우 추웠다.  하지만 여름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마루에서 수박을 먹고 엎드려 책을 보고 있으면 앞뒤로 부는 바람이 시원했다.

        

나는 내가 살았던 어느 집보다 태어나서 어린 시절 10년 살았던 이곳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다. 그곳은 내가 놀 수 있는 공간이 다양했다. 안방 건넌방 마루 마당까지 어디서든 놀 수 있었다. 마당에서 놀다 부엌으로 뛰어 들어가 뭔가 먹고 나오기도 하고, 툇마루를 통해 하루에도 몇 번씩 안방 마루 건넌방까지 들락날락했다. 어른들은 어른들의 일을 했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놀았다. 어른들이 어디에 있던 소리 질러 원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었다.     

     

대문을 열고 나가면 항상 아이들이 많았다. 골목에서 나온 우리 동네 아이들은 물론 다른 동네에서 온 아이들까지 우리 집 앞에서 놀았다. 대문 앞 넓은 공간은 놀이기구 하나 없었지만 놀이형태가 다양했다. 여자아이들은 고무줄놀이 하고 남자아이들은 딱지치기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동네가 항상 시끌벅적했다. 저녁이면 밥 먹으라고 부르는 엄마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집에 들어갈 때면 놀이가 끝나지 않아 아이들은 항상 아쉬웠다.       


             




우리나라 근대 도시한옥의 모습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던 1950년대 말 나는 태어났다. 베이붐 시대로 출산율이 높았다.  우리 동네도 한 집에 2명은 극히 드물었고 보통 4~5명, 6~7명의 형제가 있는 집도 꽤 있었다. 동네는 아이들로 활기가 넘쳤다.    


한옥은 어른들에게는 불편했겠지만 아이들을 키우기 좋은 가옥구조다. 마당이 있기 때문이다. 마당은 외부로부터 안전하다. 아이들이 마당에서 놀면 어른들이 어디 있든 아이들을 관찰할 수 있다. 집안일을 하면서도 아이들을 돌볼 수 있다. 형제 여럿이면 지들끼리 놀기 때문에 더욱 어른들의 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육아가 항상 아이들 옆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한옥의 마루 또한 아이들 놀기에는 더할 수 없이 좋은 공간이다. 마루는 외부와 내부의 완충공간이다. 마루에서 놀면 실내의 안락함과 실외의 개방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어 답답하지 않았다. 겨울을 제외하면 생활의 대부분이 마루에서 이루어진다. 마루는 안방 및 다른 방들을 마당과 이어주는 매개 역할을 하는 생활의 중심공간이다. 

                

한옥이 양옥과 다른 가장 큰 차이는 진입방식이다. 한옥은 부엌과 마루 방들이 모두 마당을 통과해 진입한다. 일단 외부에서 대문을 통해 들어오면 마당을 거쳐 마루로 올라갈 수도 있고 부엌으로 내려갈 수도 있다. 마당에서 건넌방으로 직접 들어갈 수도 있고 아랫방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각 방앞에 있는 툇마루에 앉아 마당을 바라보며 이야기할 수도 있고, 쉴 수도 있고, 멍 때리며 마당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볼 수도 있다. 


밖에서 놀다 넝마를 줍는 사람이나 거지가 나타나면 무서워서 마당으로 뛰어 들어와서 대문을 잠갔다. 아이들과 다투다가도 집마당으로 들어오면 마음이 안정되었다. 마당에서는 하늘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술래잡기하면 장독 뒤에 숨을 수도 있고 장독 위에 말리는 고구마를 집어 먹을 수도 있었다. 마당은 아이들에게 밖이면서도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참으로 편안한 공간이다. 


내가 그 시절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재미있게 잘 놀 수 있는 마당이 있어서일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아버지께서 다른 지방으로 발령을 받으셨다. 우리가 이사할 때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 아쉬워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양옥으로 이사 간다고 자랑했다. 당시 한옥이 춥고 불편해서 양옥집에서 사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바람이었다. 


양옥으로 아사 간 나는 집에 대한 기억이 없다. 대신 버스가 다니는 한 길가에 나가 하염없이 버스 오기를 기다렸던 기억이 있다. 수원 인천을 오가는 태화버스, 지금도 버스의 이름까지 생각난다. 하염없이 기다리다  버스가 한번 지나가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봤다. 저 버스만 타면 당장이라도 내가 살았던 곳으로 갈 수 있고 함께 놀았던 아이들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한 동안을 내가 살았던 한옥집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몇 년 전, 드라마 ‘기억하라 1988’을 보았다. 

덕선이네가 강남으로 이사 가는 것을 보면서 궁금했다.


'덕선이는 강남으로 이사 가서 쌍문동에서 살 때보다 행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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