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기억이 있는 곳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집보다 동네가 먼저 생각난다. 성곽길, 성벽, 성문....
나는 어느 동네든 이렇게 멋진 성문이 있는 줄 알았다.
나는 부르주아다. 부르주아라고 하면 지금은 부를 축적한 사람을 말하지만 원래는 성에 둘러싸인 중세 도시국가에서 성 안에 사는 주민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나는 수원화성 서쪽에 위치한 화서문 안에 살았다.
수원화성은 총길이 5.7킬로이며 동서남북 4개의 큰 문과 角樓(각루) 砲樓(포루) 암문 수문 공심돈 등 48개의 건물이 있다. 한양도성이 조선의 수도로 600년의 역사를 지녔다면 수원화성은 200여 년 역사로 규모도 작지만 성이 아름답고 주민들의 생활공간과 밀접하다. 우리 동네는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이 동네를 감싸고 있는 평안한 마을이다. 화서문에서 팔달산으로 올라가면서 뒤를 바라보면 화서문과 공심돈과 함께 우리 동네가 보인다.
내가 자랄 때는 성이 아이들에게는 놀이터였다. 문화재라는 개념이 부족했던 시절이라 아이들은 성문 계단을 오르내리고 성문 안에 들어가 놀았다. 어느 날 아이들을 따라 공심돈에 들어가 컴컴한 계단을 한 칸 한 칸 조심스럽게 내려가면서 쿵쿵 울리던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성에 올라가면 성 밖의 발아래는 낭떠러지다(수원화성은 내탁방식이라 성 안쪽은 언덕이고 성밖의 높이는 3~5m 정도다). 군데군데 포화에 무너져 내린 성벽으로 아이들은 성 밖으로 기어내려 갔다. 성 안은 마을이었지만 성 밖은 다른 세계였다. 넓게 펼쳐진 논은 황금물결로 출렁였고 논에 들어가 메뚜기 잡으며 아이들은 들로 밭으로 뛰어다녔다.
성은 많은 것을 말해줬다. 200년 전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에 의해 돌아가신 이야기, 정조대왕이 비운에 돌아가신 사도세자를 위해 아버지의 능을 옮긴 이야기, 아버지의 묘를 참배하기 위해 신도시를 건설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이야기를 들으며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아버지가 보고 싶은만큼 수원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배우지 않아도 스미듯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자랄 때 전쟁이 끝난 지 10여 년이 넘게 지났지만 그 상흔은 여전했다. 무너진 성을 보며 중공군 폭격이 얼마나 심했던지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지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았다. 무너진 수원성을 아이들은 노래로 표현했다. '동문은 도망가고, 서문은 서 있고 남문은 남아 있고 북문은 부서졌다'라고 노래했다. 당시 동문인 창룡문은 전혀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북문인 장안문은 지붕이 날아가서 성문 아래만 남아 있었다. 서문인 화서문과 남문인 팔달문은 전쟁의 피해가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이 노래는 당시 수원화성의 모습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수원화성의 문은 동서남북(창룡문, 화서문, 팔달문, 장안문)으로 큰 문이 있는데 남북(팔달문, 장안문)이 문이 크기와 모양이 비슷하고 동서(창룡문, 화서문)의 문이 크기와 모양이 비슷하다. 지금의 완벽한 모습은 이후 복원한 모습이다. 우리 마을이 있던 화서문 옆에는 서북공심돈이라는 큰 망루가 있다. 옹성을 포함한 화서문과 공심돈은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원형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
우리 동네에서 영화촬영을 많이 했다. 영화 촬영은 동네 아이들에게 신나는 볼거리였다. 유명한 영화배우가 온다는 소문이 나면 동네가 들썩였다. 유명 배우의 모습을 보기위해 사람들은 성으로 몰려들었다. 배우들이 분장하는 모습, 연기하는 모습을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해 아이들은 가까이 가다 혼이 나기도 했다. 남편(같은 동네에서 자라서 어린 시절을 공유한다)은 엑스트라로 선발되어 빵을 받아먹기도 했다고 한다.
어쩌다 성에서 외국인 관광객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외국으로 나갈 수는 없었던 시절이었는데 서양사람들이 우리 문화재를 보기 위해 수원까지 내려온 것이다. 아이들은 낯선 서양인들을 따라다녔다. 직접 서양인을 본다는 것이 신기했다. 전쟁 중 서양 군인을 따라다니던 아이들은 관광객에게도 껌을 달라고 했다. 그들 눈에 비친 우리는 어땠을까?
장소는 인간이 세계와 접촉하는 곳이다. 장소에서 사람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이해한다. 내가 태어나서 세상을 이해하였던 곳은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낸 화서문 안의 한 마을이었다. 수원성 옆에 살면서 특별히 역사공부를 하지 않았는데도 아버지인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였다는 역사적 사실과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대왕이 화성에 능을 만들고 자주 수원을 찾았던 사실을 스미듯이 알게 되었다.
장소는 기억에서 비롯된다. 그 기억은 머릿 속에서 다시 각색된다. 어릴적 기억은 실제보다 크게 생각되고 과장되기도 한다. 수원에서의 어린 시절 기억이 나의 일부가 되어 전공을 택할 때나 결혼과 같은 중요한 결정의 시기에 영향을 미쳤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닌가 보다.
미국에 사는 친구가 있다. 친구의 초청으로 미국에 가게 되었다. 친구 남편은 젊은 시절 한국을 떠나 미국에 정착했다. 친구 부부와 우리 부부는 여행을 함께하면서 점점 친해졌다. 저녁이면 식사를 마치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 내용의 대부분은 한국에서 살았던 곳이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너무나 생생하고 구체적이었다.
사실 나이를 추정해 보면 친구 남편은 불과 서너 살 때 고향을 떠났다. 오랜 시간 고향을 기억으로 만들며 살아왔을 것이다. 가까이 사는 형과 누나들과 만나면 고향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외국에 살면서 고향이 그리웠을 것이다. 형과 누나들에게 들은 이야기도 내 경험으로 기억되고 저장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타국 생활에 삶의 힘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세상의 일부다.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의 공간을 만들며 살아간다. 우리를 둘러싼 공간에서 우리 자신을 형성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공간을 파괴하기도 하고 새로운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공간이 기억 속에 사라지기도 하지만 증폭되기도 한다. 기억 속의 공간이 현실 속에서 사라질 때 안타깝다. 공간이 개인적인 장소로 기억되고 현실에서도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남아 있으면 좋겠다.
기억의 공간은 특별한 장소가 된다.
특별한 장소는 골목에서 웃고 떠드는 친구들의 목소리, 담 장 한옆에 맺힌 풀잎 이슬방울, 기와를 타고 내려오는 빗물, 처마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날아가는 참새 소리처럼 작은 것에서 올 수도 있다. 잠에서 깨어 밖에 나가서 마신 새벽 공기, 발밑에 닿는 자갈의 느낌이나 맨살에 닿는 따뜻한 햇볕에서 올 수도 있고 깜깜하고 고요한 우주공간에 떠있는 지구의 이미지처럼 거창한 것에서 올 수도 있다.
삶의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공간에 대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기억이 있는 장소가 많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