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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앙마 Dec 12. 2022

무지개의 끝에, 꼭 실체가 있어야 할까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김금희, 창비, 2021)

나는 그냥 강선이
누구를 기다리는 사람 같던데.

누구를?

뭘 기다리는지는 모르지만
그냥 그렇게 혼자 자꾸자꾸
뭔가를 기다리고 싶어 하는 사람.
-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중에서

40대에 접어드니 살아온 시간들을 가끔 돌아보게 된다. 폭풍처럼 질주하며 찬란하게 반짝였던 여름철, 그 절정을 지나 이제는 더위 맛도 알았고 조금은 차분해져야 하는 회고의 시점쯤 들어왔다고나 할까. 가속도는 점차 사라지고 안정적인 등속 운동을 하는 궤도쯤 올라섰다고나 할까.


그래서 슬쩍 돌아본 10년 내지 20년의 무지개 속에는 청춘이 흘려놓은 흔적들이 엿보인다. 여전히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하나 분명한 건, 자취가 남았고 움푹움푹 패인 그 자취가 화석처럼 굳어서 내 역사가 되었음을 끄덕거리며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김금희의 소설들 역시 그렇다. 조금은 세상을 알게 된 듯한 나이, 조심스레 꺼내보고 다시 넣어두기를 반복하며 강요된 성숙을 다소는 수용하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청춘의 무지개 위 어딘가를 달리고 있는, 그 치열함에서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다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긴 하다. 사랑도, 이별도, 기쁨도, 좌절도, 온전히 다 받아들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 흔적들을 이제는 담담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된 듯하다.


우리는 모두 페퍼로니에서 왔지만 여전히 페퍼로니를 꿈꾸며 페퍼로니를 향하고 싶어 한다. 그 끝에 무엇이 실재하는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페퍼로니를 기다리고 싶을 뿐이다.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귀찮은 건 어쩌면
이루지 못할 꿈이 있다는 것 아닐까,
하면서 씁쓸해했지만
나는 어쩌면 그조차
우리가 헤어지고 나서야 얻게 된
삶의 진실이 아닐까 생각했다.
- '깊이와 기울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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