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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앙마 Feb 01. 2023

내 존재감의 실마리도 진정한 장소에서 찾을 수 있을까

진정한 장소(아니 애르노/미셸 포르트, 1984BOOKS, 2019)

항상 글을 쓰고 싶었다.


말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글을 통해 표현하는 게 사실 더 많이 좋았다. 뭐랄까. 말하는 것은 '관계 사이에서 버티기 위한' 것이지만 글쓰기는 오롯이 '나'를 드러낼 수 있는, 뭔가 진짜 자유로운 짜릿함 같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불안했던 1997년 12월 31일. 26년째 이어지고 있는 일기의 첫날이다. 물론 그전에도 일기를 쓰긴 했지만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숙제 정도 수준에 불과했다. 백일장이나 대회에 나가서 상을 타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역시 온전히 나를 쓴다기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글쓰기였다. 불안의 언덕을 한참 넘고 있는 와중에서야 의무감으로서의 글쓰기가 아닌, 온전한 나의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아이러니하다.


그렇지만 '일기' 그 이상의 글쓰기는 여전히 주저하게 된다. 독서에 더 몰두하는 것도 어쩌면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커지는 만큼의 반작용이다. 숙제처럼 보여주는 글쓰기 대신 쓰는 글쓰기를 업으로 삼게 되다 보니 오히려 내 욕구는 안으로 집어삼켜야만 하는 불온한 무언가가 된 것 같다.


저는 말해야 할 모든 것들 앞에서 가난했어요. 글을 쓰는 순간 모든 것이 두려웠죠. 시간이 갈수록 모든 것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요. 선택이 중요한 거죠. 구해야 할 것을 선택하는 것이요. (중략) 책을 펼친다는 것, 그것은 정말 문을 밀고 들어가서 자신을 위해 어떤 일이 펼쳐지는 장소에 있게 되는 것이죠. 저는 독서를 그렇게 생각해요. (중략) 글쓰기란 시간을 창조하는 일이죠. 독자들이 들어가게 될 시간이요. (중략) 그것을 생각하면 정말 환상적이죠. (글쓰기, 그것은 하나의 상태예요/p.99~101)
글쓰기는 <진정한 나만의 장소다> (중략) 그곳은 내가 자리한 모든 장소들 중에서 유일하게 비물질적인 장소이며, 어느 곳이라고 지정할 수 없지만, 나는 어쨌든 그곳에 그 모든 장소들이 담겨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서문/p.10)


2022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아니 에르노의 인터뷰는 그런 내 안에 뭔가 변화의 싹을 심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을 정도의 그조차 글쓰기 앞에서 두려웠다는 고백, 그렇지만 시간을 창조하는 글쓰기의 매력에 이끌려 여전히 글을 쓰고 있고 그것이 자신의 '진정한 장소'임을 확신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는 회고에 새삼 뭔가 다시 꿈틀거림을 느꼈다.


무엇인가에 대해 쓰지 않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파리, 나는 그곳에 절대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19p.)
글을 쓰는 것은 이름이나 사람으로서 흔적을 남기는 게 아니에요. 시선의 흔적을 남기는 거죠. (강바닥에 있는 돌을 꺼내기/p.85)
글쓰기는 현실을 보여 주기 위해 겉으로 드러난 것들을 찢는 거죠. (중략) 문학은 인생이 아니에요. 문학은 인생의 불투명함을 밝히는 것이거나 혹은 밝혀야만 하는 것이죠. (핵심으로/p.91, p.95)
체험들이 당신의 것에서만 머무는 방식을 글을 써서는 안 돼요. 개인적인 것들을 넘어서야 하죠. 그래요. 그것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하고 다르게 살게 하며, 또한 행복하게 해 주죠. (진정한 장소/p.124)


그는 자신의 경험을 사회적 문제로 확장시키는 글쓰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름이나 사람으로서의 흔적을 남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라져 버리고 말 무엇인가를 선택하여 '시선의 흔적'을 남김으로써 질문하는 삶, 변화하는 삶으로 이끄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거리에 함께 나서고 문제에 귀 기울이며 구호에 동참한다.


사소해 보일 수도 있는 개인적 경험, 하지만 그 속에 사회적 문제점이 숨어 있고 끌어내야 할 무언가의 소외가 담겨 있다. 어쩌면 내 글쓰기에 대한 망설임은 그것을 온전히 드러내야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무수히 많은 말을 통해 '관계 속에서 온전하고자 하는' 안주에의 의지와 그 모래성이 무너질까 싶은 공포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왜'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고자 한다. 나는 '왜' 사는가.


그 질문에 먼저 답을 할 수 있어야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명쾌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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