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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앙마 Feb 11. 2023

혐오의 총량을 줄이려면 공존의 지혜부터

왜 이대남은 동네북이 되었나(이선옥, 담담사무소, 2022)

이대남은 보수화되었는가.


질문부터 잘못되었다. 이대남은 보수화되지도, 스스로를 이대남이라고 규정짓지도 않았다. 이쪽 아니면 저쪽이라는 이분법적 편 가르기, 몇 가지 현상만으로 집단을 규정하려는 의도가 만든 구분일 뿐이다.


그런데 그 구분이 2030을 혐오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사회적 혐오의 총량을 증가시키고 있다.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고 세대와 성별의 필터까지 더해지면서 서로를 불구대천의 적으로 만들고 있다.


이쯤 되면 공격과 대립을 주고받는 모두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상대를 인정하는 기본자세 없이 공존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의 주장에 100% 동의하진 않는다. 이대남 당사자도 아니고 뒷부분으로 갈수록 단정적인 단어와 표현으로 페미니즘 자체를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토록 거칠게 비판하는 페미니즘의 단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고해야 할 주장이다. 이대남은 결코 괴물이 아니다. 시대에 역행하는 반동분자들도 아니다. 586이 주도해 온 교육체계를 거치며 존재해 온 평범한 젊은이들이다. 이대남, 이대녀라고 구분 짓고, 존재하지 않는 세대 내의 갈등과 분열을 조장한 이들은, 이념은 과연 무엇인가.


절대적으로 옳은 가치와 이념은 없다.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맹목적 믿음, 그리고 그 믿음에 기반하여 나의 내로남불마저 정당화하려는 모순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과 혐오의 이면에 깔려 있다.


물론 기존의 기득권 반대편에 여전히 불평등과 부조리, 소수와 불공정은 분명 존재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으려는 시도가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불공정과 비판마저 적으로 규정하고 배타적으로 대한다면 사회는 쪼개지고 극단화될 가능성이 커진다.


혐오의 총량을 줄여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상 대 비정상', '이대남 대 이대녀'같은 단순한 이분법적 대립항을 무너뜨리고 공존의 지혜를 모색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대중은 현실을 사는데 운동은 관념에 머문다'는 말을 계속 곱씹게 된다. 철저한 반성과 과감한 결별이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이다. 그래야 새로운 걸 받아들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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