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른 틈새(권여선, 문학동네, 2024)
기다림은 시간에 대한 의식을 새롭게 한다.(p.18)
거칠게 부서지는 파도와 무섭게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곤두박질치는 꿈의 순간에도 나는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고, 내 귓가에 흐느끼듯 부서지는 그 목소리가 있는 한 언제든 우아하고 아름답게 죽어갈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p.46)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안타까운 그리움(p.72)
1996년 출간된 책이지만 오늘의 젊은 세대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반복되는 실패, 채워지지 않는 결핍, 사랑에 대한 허구와 그 깨달음. 이 모든 것이 세대를 막론하고 청춘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민이라면 30년의 시간을 넘어 지금에도 충분히 유효하지 않겠는가. 20대, 그 화려한 시기에 할 수 있는, 할 수밖에 없는 고민이며 좌절이자 깨달음이다.
하지만 습기 가득한 반지하 방을 탈출하는 7일의 짧은 회고가 청춘의 모든 고민을 일거에 해소시켜 주리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의무(파랑새 신화)와 과감히 결별하기 위해 패륜과 자아 파괴를 시도하지만 결국 그 또한 또 하나의 실패로 끝나는 모습은, 간신히 마련한 '틈새'가 아직 가능성일 뿐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시도 자체도 성장이다. 그 시도가 아니었다면 틈새조차 마련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오늘의 청춘들에게는 그 틈새를 찾을 수 있는 기회 자체가 마련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회의가 30년의 시간을 실감케 했다. 적어도 1996년의 저자는 일을 하고, 독립을 하고,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늘날의 청춘들은 축축한 반지하 단칸방을 벗어나는 것조차 버겁다. 사랑도, 고민도, 실패도 힘든 세대. 그들에게 과연 푸르른 틈새는 열릴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사치일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