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이란 시인의 것이었다.
최승자 시인이 번역한 책들을 골라왔다.
죽음의 엘리지.
워터멜론 슈거
하나는 시집이었고
하나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옆 벽에서는 쥐가 내장재를 긁고 있는 소리가 또 나고 있다.
처음에는 소스라치게 놀랐었다.
주택에 사는 삶이란
목가적이고 자연과 함께 하는 낭만을 꿈꾸었었지
선진국의 도시에서는 결코 볼일 없는 쥐와의 동거는 아니었다.
필리핀에서 십대를 보낸 친구는 말했다.
우리는 쥐 자주 봤는데?
쥐 소리를 확인한 그 날 나는 공포에 질려 잠을 이루기 어려웠고
내가 벽을 두드렸건만
아랑곳하지 않고 도망가지 않는 쥐에게 화가 났었다.
아마 그 분노는 편도체의 공포반응이었으리라.
그리고 성찰하기 시작했다.
대체 저 조그마한 쥐가 뭐길래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을 뿐 저들은 이 곳 도시에서도 자연속에서도 살아간다.
나를 해칠 수 없고
아마 내가 그의 앞에 나타난다면 ?
소스라치게 도망칠 것이다.
시인의 삶을 원한다면
편리했으나 그만큼 착취당했던 도시의 삶 대신
이곳의 목가적인 삶을 원한다면
나는 쥐를 인정해야했다.
워터멜론 슈거에서 주인공은 부모를 잡아먹은 호랑이를
어떤 방식이건 인정한다.
그들은 그렇게 태어났고
그럴 수 밖에 없는 본능을 가진 돔물이다.
다시 돌아와 시인의 즐거움이란
빛, 고독, 자연세계,사랑, 시간, 창조 그 자체이다.
좋아하는 것만 보면 딱 시인인데
이제 시만 쓰면 되겠다.
메이 사튼은
시는 느끼는 것이고
소설은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산문을 쓰는 것보다 시를 쓰는 것이
더 진실되고 고양되는 느낌을 준다고 했다.
나 또한 그런 것 같다.
이 브런치의 글이 어느 날 시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르트르는 구토에서 말했다.
로강탱이 말했다고 해야할까?
내가 기억하는 한
계획해서 쓰지 말고
그냥 나오는대로 소위 의식의 흐름대로 쓰라고.
사회와 불화하며
사회를 향해 끊임없는 승인을
요구하는 것은 자살 행위다. 그리고 심심치 않게 자살로 이어진다.
낭만적 사랑에는 원래 헌신이 없다.
열정과 유대감만 있을 뿐이고
꿈처럼 완전한 행복과 유대감을 느끼다가
어느 날 본래의 특성이었던
꿈처럼 깨어지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꿈이 현실보다 영향력이 있었다면
과연 무엇이 꿈이고 현실일지는 결정할 수 있을 것 같다.
현실이 악몽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승인을 바란다면
언제까지 꿈에 대한 배신감으로
미움과 원망 속에 살아야하리라.
나는 거짓이 되어버린 악몽이 되어버린 그 꿈을 그 낭만을 사랑한다.
내게 평생 매일 사랑한다고 말해주겠다던 그 사람은
어디에 갔는지 나는 홀로지만
나는 그 때를 기억한다.
그 때의 편지와 일기들, 향기와 장면을 떠올리면
정말이지 가소롭긴하지만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하여 사기로 치부하지 않는다면
입가의 미소는 주름에 대한 공포를 넘어서버린다.
그 날은 다시 올 예정이 없기에
나는 눈을 감고 낭만을 현재로 끌어온다.
그것을 환기 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술.
디스토피아의 현재로 그 극치의 아름다움을 쳐들어오게하는 힘.
그래서 희망을 갖게하고 살게 하는 힘.
그 아름다움이 과연 진실이 아닐까?
예술이 생명감을 고양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예술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외쳤던 사튼.
이 디스토피아에서 예술이 아니고서
무의미함에도 생명감을 고양시키는 것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