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삶에 대하여.
현대 사회에서는 좋은 직업과 경제적 능력이 존중과 사랑을 받을 조건이 된다.
그러한 속물 사회에서 상징 질서를 거부한 채 개인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을까?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타인에게 자신을 알리기위해서는 언어가 필요하다.
그러나 기존의 언어는 필연적으로 기존의 질서를 옹호하고 강화한다.
개인이 그 시대의 속물적 가치를 부정하고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하고 싶다면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새로운 언어는 어떻게 확립할 수 있을까?
아무런 검열없이 내재화되어버린 집단의 가치와 윤리, 문화의 틀을 어떻게 인식하고
새롭게 자신을 구축할 것인가?
그것을 체념하게 하는 집요한 사회에 저항하기를 멈추고
생존에 대한 두려움으로 봉건적 질서에 아첨하고 복종하는 삶을 살 것인가?
또는 이렇게 자신으로 살 수 없는 불행을 보통화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을 것인가?
저항하기에는 너무 크고 나와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체념하기에는 자유가 그립고 소명이 부르짖는다.
소설이란 시대의 상징질서가 억압하고 은폐하는 것들을 폭로한다.
그렇게 각 시대의 작가들은 체념할 수도 저항할 수 없는 구조안에서
분열되고 신경쇠약에 걸려왔다.
기존의 언어 질서 안에서 생을 시작하고 죽음을 맞는 일개 작가가
그 시대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라는 도구로
세상의 진실을 해체하고 상징화해서 전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두려웠을까.
신조차도 상징화된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개시하는데
인간 자신이 인간과 함께 살아가면서 언어라는 도구를 포기할 수는 없었으리라.
그러나 언어란 결국 봉건적 질서에 이바지하고야 만다.
세상을 해체했던 작가는 다시 새로운 시대의 선구자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의 질서가 되고야 만다.
신 중심의 질서를 해체하고 자살시도를 반복했던 과거 헤르만 헤세의 책을
지금의 젊은 세대는 성경처럼 읽는다.
유발 하라리가 말했듯 사피엔스는 신을 죽이고 자신이 신이 되려고 한다.
우리는 신이 되기를 꿈꾸는 세상, 자신 안의 신을 깨어나게하는 것을 자아실현이라고 명명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아직 신이 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아실현한 인간을 롤모델로 추앙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기존 질서에 편입하지 못한 사람들은 분열하며 신경쇠약에 걸려있다.
김금희의 '보통의 시절'에 나오는 오빠의 폭력 후에 찾아오는 아이스크림의 단맛처럼 일각의 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보통의 삶을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속물적인 가치를 거절한 조용한 삶이란 내면의 언어가 풍부한 삶일까, 언어조차 버리고 신과 자연과 교감하는 수행의 삶일까.
어떤 언어만 남겨놓아야할까? 그것을 결정할 수 있을까?
언어가 언어와 싸울 때, 언어가 깨달음을 방해하고 체제에 복속시킬 때
언어 금식이 필요하다.
그것은 홀로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사회는 끊임없이 말한다.
전화, 메세지, 이메일, 뉴스, OTT...어디에나 언어가 범람하듯 밀려온다.
소화시키지 않고 토해내고 싶다.
비만처럼 돈이 되지 않기에 아무도 경고하지 않지만
영혼이 소리없이 질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