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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요 Apr 12. 2021

퇴사 후 1년 4개월 차, 반려동물일러스트레이터가 되다

  퇴사 후, 1년 4개월 차가 되었다.

  우려하던 이들의 예상과 달리 아직 회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생각했던 일들을 하나씩 해나가면서 회사 밖에서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다.


  작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거의 매일 그림을 그리고 있다. 1년 여간 연필, 색연필, 수채화, 오일파스텔, 아이패드를 사용해 다양한 그림들을 그려냈다. 어떤 종착점을 떠올리면서 해나가지는 않았지만, 내일은 더 나은 실력이 되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는 있었다. 묵묵히 한 장, 한 장 그림을 그려나가면서 기쁘기도 했고 지루하기도 했다. 오래 집중하느라 눈과 손목이 아프기도 했으나 완성된 작품을 마주하면 이내 괜찮아지곤 했다.


  그러던 올해 초, 큰 결심을 하고 SNS 이벤트를 진행했다. 이벤트 참가자 전원에게 반려묘 일러스트를 그려주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SNS 홍보를 위한 목적이었으나, 이내 그 목표가 바뀌어 내 그림을 통해 더 많은 이들에게 기쁨을 주고 싶어 졌다. 그렇게 시작한 반려묘 초상화 그리기 프로젝트는 한 달간 총 53마리의 고양이 초상화를 남기며 마무리되었다.



  SNS 피드를 캡처하여 첨부해보았다. 캡처를 다 못 한 그림들도 있다. 한 달 동안 고양이에 미쳐서 고양이 그림만 그리며 지냈다. 하루에 열 개씩 그린 날도 있고, 하나 겨우 그린 날도 있다. 열흘 정도 하고 나니 몸에 이상이 오기도 했다. 시름시름 아파도 약속은 지키고 싶어 끝까지 그림을 그렸다. 이런 힘든 시간을 지나고 나니 고양이 이목구비는 사진 없어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반려동물을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싶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 동안 그림을 제대로 그리지 않았다. 너무 열심히 한 탓인가? 그림보다는 공방을 운영하는 일에 더 치중했던 것 같다. 그림을 쉬는 동안 미뤄두었던 에세이 책을 발간하고 하리의 멋진 바느질 패키지를 만들어내기도 하며 일상을 보냈다.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문득 반려동물을 다시금 그리고 싶어 졌다. 그림으로 세상과 다시 소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이제는 일러스트레이터로 사람들과 만나고 싶어 졌다. 당당하게 내 이름을 걸고 그리는 그림 말이다. 풍요하리는 이미 아이디어스에서 입점된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온라인 반려동물 초상화는 주로 아이디어스에서 판매되고 있다. 며칠간 어떤 방향의 그림을 그릴지 많은 고민을 했다. 주춤거리면서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졌다. 내 그림이 재화와 교환될 수 있을 만큼의 퀄리티인지, 사람들이 만족해줄 것인지 자신이 없어지기도 했다. 시간만 죽치고 있을 수 없어서 그냥 시작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생각을 최대한 단순하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깨닫고 있었다. 그간 그렸던 그림들을 추려 아이디어스에 업로드했다.


하루아침에 인기 작가가 될 일은 당연히 없다.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반려동물을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 풍요입니다.

  나의 데뷔(?) 오랫동안 나의 반려동물 그림을 기다려주신  덕에 가능해졌다. 반려동물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하면서 무료 이벤트를 참여해주신 걸로만 알았던 견주님에게 제일 먼저 그림 선물을 전달했다. 거의   동안 기다려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감사하게도 기다려주신 것만으로도 모자라 다른 반려동물들의 그림을 주문해주셨다.  주문이다. 드디어 진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을 하게 됐다.  날은 퇴사  기억에 남는 기쁜  중에 하나가 되었다. 지금은 모든 주문 건을 완료한 상태다. 자신 있게 다른 주문도 받을  있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 동안 내내 행복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림과 관련된 일이 무조건 행복하고 열일 마다하지 않고 할 만큼 다른 일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돈을 버는 일은 다 똑같은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스스로의 길을 찾아 한 발자국 나아간다는 것은 스스로의 효용성을 증명해볼 수 있는 더없이 기쁜 일이다. 앞으로 무슨 일을 더 하게 될지 알 수는 없지만, 오늘의 이 기쁜 순간을 잊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만큼은 꼭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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