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까지도 꿀직업인줄 알았다
작년 이맘 때는 공방에 앉아서 언니와 사부작거렸고 재작년에는 뭐를 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안 좋은 기억일수록 빠르게 잊는다고는 하지만 1년 8개월이 지난 이제는 좋았는지 아니었는지도 흐릿해져 간다. 그때의 나는 작은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었을 것이며 이맘때 쯔음이면 국가도서관 통계를 작성하고 있었으려나. 8월이 고통스럽게 남아 있던 것을 보면 통계를 오롯이 혼자 알아서 해야 했던 압박감이 심했던 것 같다.
그리고 현재, 벼르고 벼른 나의 도서관 이야기를 쓰려고 침대 위에 앉아서 타자기를 두드리고 있다. 오늘 배송 온 스마트 키보드 성능이 좋아서 글을 쓰고 싶어 진다. 여새를 몰아서 반년 넘게 책장에 고이 잠들어 있던 노트를 꺼내왔다. 사서와 관련된 목차만 써놓았는데 주제가 30개나 넘는다. 더 잊기 전에 어서 글로 풀어내야겠다는 생각에 조급해진다.
2017년 2월, 잘 다니던 전 직장에서 인수인계를 2주 만에 하고 나왔다. 회사에서 2주 만에 업무를 정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이직하려고 하는 나의 평생직장(당시의 마음이다) 도서관 경영지원팀에서 시간을 딱 그만큼만 주었다. 추가합격자였던 당시의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바늘구멍보다 좁다는 도서관 취업. 거기다가 정직원이고 집과 같은 구역에서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전 직장에서 나쁜 소리를 듣더라도 나올 수밖에 없었다.
2월 말에 고대하던 나의 평생직장, 도서관으로 첫 출근을 했다. 겨울의 막바지여서 굉장히 추웠다. 출근 첫날이니 들뜬 마음에 평소 잘 입지도 않았던 원피스와 구두까지 착용하고 나섰다. 두근두근 설렜다.
첫 출근한 도서관은 중학생 때부터 잘 이용했던 우리 지역 제일 큰 도서관이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의 추억이 곳곳에 있다. 함께 열람실에서 공부하고 지하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컵라면을 먹었던 그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때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다.
회사 짬바 5년 차였던 나는 보이는 모든 분들에게 인사를 드렸다. 앞으로 오랫동안 볼 나의 동료들이었다. 무언가가 가슴에 벅차올랐다. 잘하고 싶은 마음도 컸던 것 같다. 사무실에서 잠깐 대기를 하는데 긴장감에 손이 젖어들었다. 그리고 역시 회사 짬바는 어디 가지 않는다. 지금 나는 이 도서관에서 어떤 포지션으로 배정될지 알 수 없는 인력이었다. 아까 언급했듯이 추가합격자여서 먼저 들어온 나의 동기는 이미 제 역할을 배정받아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잘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잠깐의 어색한 시간이 흐르고 나는 정리실로 배정되었다. 물론 임시 자리였다. 얼핏 들어보니 새롭게 개관하는 어린이도서관에 배정된다고 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열심히 공부하고 혼자서 뭐라도 일을 찾아 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렇게 나의 사서 생활이 시작됐다.
정리실에도 꽤 많은 인력이 있었다. 수서, 정리, 전산 파트가 모여 있었다. 사무실보다 훨씬 조용했고 모두가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사수도 주어진 업무도 없었다. 직장 생활해보신 분들은 잘 알 거다. 일이 주어지지 않으면 미칠 것 같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타인의 눈치를 굉장히 많이 보는 타입이기 때문에 눈치가 정말 많이 보였다. 가만있자니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고 일을 하자니 아는 게 없었다. 가만히 옆에 놓여 있던 수서 매뉴얼을 뒤적거리며 열독을 했다. 그래도 시간은 가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괴감이 증폭되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하러 이직을 했을까? 나름 전 직장에서 잘했다고 인정도 받았는데, 한없이 자존감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을 하던 그때,
“풍요씨, 장비 업무 좀 도와줄래요?”
(임시) 사수님이 내게 말을 건넸다. 도서관에서는 책이 이용자에게 전달되기 전에 도난 방지 스티커, 청구기호 라벨, 등록번호 라벨, 도서관 규정 스티커 등의 일련의 장비 작업을 수행한다. 간단해 보여도 초보자들은 실수를 연발하는 일이다. 그런 것도 잘 몰랐던 내게 들린 이 한 마디가 구세주 같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따로 없었다. 내게 첫 일이 주어진 거다.
정말로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한 뒤 일을 하기 시작했다. 속으로는 눈물이 나는 것 같았다. 존재 이유를 여기서 찾은 것처럼 혼신을 다해 장비작업을 했던 것 같다. 일 년에 1억이 넘는 예산을 집행하는 센터 도서관답게 장비 작업할 책은 참 많았다. 첫 일을 시작하고 나서 나는 두 다리를 쭉 뻗고 잘 수 있게 된 것 같다. 다시 그때를 돌이켜봐도 임시 사수님에게 감사의 마음이 든다. 지금은 아득한 추억이 된 장비 작업을 시작하는 누군가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장비 작업이 쉬워보여도 책 입장에서는 가장 중요한 꽃단장이랍니다.”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