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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요 Oct 17. 2020

실력이 부족하면 장비빨이라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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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사생대회 그림 트라우마와 관련된 이야기를 적었다. 그리고 수채화를 도화지에 그리면 어떤 그림이 그려지는지도 이야기했다. 그렇다. 수채화는 장비빨이다. 이건 순전히 내 의견이지만, 실력이 부족하면 장비빨이라도 세워야 한다는 건 정말 강조하고 싶다.     


  우선, 수채화를 그리려면 재료가 많이 필요하다. 수채화 전용 종이, 붓, 물감, 물통, 물기 닦을 걸레가 필요하다. 워터 브러시가 나온 이후 붓, 물통이 간편하게 합쳐지긴 했지만, 물 조절을 자유롭게 하려면 일반 붓이 더 낫다. 이는 물론 내 기준이다. 워터 브러시도 충분히 좋은 재료이나 밖에서 그리는 어반 드로잉 용으로 더 적합한 것 같다. 사실 재료가 많이 필요하다는 점이 수채화 그림의 매력이기도 하다. 여러 재료를 사용해서 다채로운 색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색의 제한이 없어 어려우면서도 매력적이다. 

    

  물감은 지인이 선물해준 전문가용으로 시작했고 다음으로 준비한 재료는 붓과 종이였다. 당시 재료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몰랐기에 적당한 가격의 수채화 용지를 샀다. 익숙하지 않은 물건의 가치는 직접 사용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기에 비싼 재료를 덥석 살 자신이 없었다. 사실 처음 산 재료도 그리 저렴한 가격은 아니었다. 그림 하려면 금전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전 직장에서 개처럼 열심히 벌어 차곡차곡 모아둔 돈을 그림을 그리기 위해 쓰기 시작했다. 살면서 돈을 모을 줄만 알았지 쓸 줄은 몰랐다. 오히려 직장인일 때 더 쪼들리며 살았던 것 같다. 돈을 모으느라 여유가 없었다. 취미도 쉽사리 가질 수 없던 때였다. 퇴사하고 나니 어차피 나갈 돈밖에 없었다. 고삐 풀린 말처럼 돈을 술술 써댔다. 여러 재료를 샀다. 직접 써보니 내게 잘 맞는 것들을 찾을 수 있었다. 투자하면 할수록 그림이 업그레이드됐다.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언니는 나를 책망하기보단 적절한 투자가 필요하다고 독려해주었다. 평생 자신에게 제대로 투자해본 적이 없지 않냐는 언니의 말이 도화선이 되어 더욱 가열하게 재료를 구입했다.     


  여러 재료를 써보면서 느낀 점은 물감보다는 붓, 붓보다는 종이를 바꾸니 그림이 확연히 달라졌다. 천연모 붓을 사서 그린 그림은 감동적이었다. 내 그림 방식에 잘 어울리는 재료였다. 종이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코튼 함량이 높고 두꺼울수록 물을 얹었을 때 종이가 일어나지 않았고, 물도 듬뿍 머금었다. 팔레트 위 내 마음에 쏙 드는 초록색 물감을 물과 함께 붓에 잔뜩 묻힌다. 그대로 종이에 그려진 나뭇잎에 살포시 올려 붓을 놀린다. 사르륵 물감이 종이에 스민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과정은 힐링 그 자체다.  

   

  요즘은 원하는 재료를 많이 사본 후라 있는 재료를 잘 활용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못 써본 재료가 훨씬 많지만, 그건 차차 사용해볼 계획이다. 그림을 하루 이틀 그릴 것이 아니니까. 먼 훗날 외국 여행을 갈 수 있게 된다면 여러 나라의 화방에 꼭 들러보고 싶다. 인터넷으로 간단하게 클릭해서 주문하는 방식이 아니라 재료의 고향에서 직접 사보는 것이 내 꿈이 되었다.

  

[그림 위를 걷는 고양이처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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