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의 것들
초등학교라고 하기엔, 사실은 국민학교에 7살에 입학했다. 지금은 사라진 ‘빠른 년생‘이기 때문이었다. 유치원 선생님이 갑자기 말씀하셨다.
글치는 내년에 학교를 가니까 친구들과 작별인사를 하자.
뭔가 우쭐하면서도 겁이 덜컥 났던 기억이다. 겁먹고 시작된 첫 학년은 사실 순탄치
않았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수업에 대한 이해도가 좋지 않았다. 위축된 마음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었고 게다가 담임 선생님이 너무 무섭다는 느낌이었다. 어린 나의 오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숙제를 안 해오면 손바닥을 한 대씩 맞는 것이 꽤나 공포스러웠다. 아직도 그 막대기의 색깔이 살짝 기억난다. 그 와중에 이해력이 부족했던 나는 결국 숙제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숙제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생겼다. 저녁이 되어 고민에 휩싸였다. 당시에 생각한 최선의 결론은 최악의 결론이었다.
학교를 안 가면 돼!
그렇게 첫 학년 첫 학기에 처음이자 마지막 무단결석을 감행했다.
집에서 학교가 멀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가깝지 않고, 집에서도 떨어진 중간 정도에 있는 문방구가 학교대신 간 곳이었다. 일단 구경으로 시간을 보내자는 계획이었다. 어린아이에게 시간을 그냥 때우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공터도 기웃거리고 문방구에도 몇 번 들락날락했지만 하교시간까지 버티기는 어려웠다. 결국 어느 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집에 갔다.
‘오늘은 일찍 끝났어요’
라고 변명을 붙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리 오래가진 못했고, 2~3번의 시도 끝에 걸리게 되었다. 아마도 문방구 아줌마의 제보도 있었을 것 같다. 감사한 일이다. 요즘 같으면 알아도 모른 척할 수 있으니 말이다.
결국 어머니와 나는 담임선생님을 보러 가게 되었다. 동네 아줌마들이 그분은 빈손으로 오는 거 안 좋아하신다고 귀띔을 하셨고, 상담을 하는 중에 서랍이 열리더라고 훗날 어머니는 이야기해 주셨다.
글치가 보름은 학교를 안 나온 거 같아요. 앞으로 주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담임선생님의 이 말만은 기억이 난다. 기간이 뻥튀기되어 있었다. 출석부로 다 나타날 일임에도 그리 말하셨다니. 다행히 어머니는 내 말을 믿어주셨다. 그리고 매 맞는 게 너무 무서워서 못 갔다는 것도 이해해 주셨다. 어머니의 이해가 아니었다면 이 일은 두고두고 트라우마가 되었을 것이다. 아무도 나의 말을 믿어주지 않고, 나의 어려움을 이해해주지 않는다는 생각의 뿌리가 생겼을 뻔했다.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선생님에 대한 안 좋은 인상은 시작된 것 같다. 이후 초등학교 내내 담임 선생님들과의 거리가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을 만날 때까지 그랬다. 돌이켜보면 중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의 헌신과 사랑이 지금의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선생님에 대한 추억을 바꿔 놓으셨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해보고 싶다.
초등학교 1학년의 기억은 그래서 어둡다. 기억의 단편들도 대부분 내가 당황하거나 혼났던 일들이다. 시대가 변했고, 선생님들의 수준도 달라진 요즘엔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인 것 같아서 감사하다.
학교에 대한 첫 추억을
담당하시는 분들에게
응원과 감사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