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의 것들
중 2의 첫 시도는 중 2병의 증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당시 이상하게도 잘 뭉쳤던 친구들이 있었다. 남자 중학교를 다니던 6명이었다. 어느 날은 갑자기 강릉을 놀러 가자고 의기투합했다.
집집마다 허락해 준 집도 있고 그렇지 않은 집도 있었다. 우리 집이 허락하지 않은 집 중 하나였고, 게다가 아버지는 친구들 전체를 호출하셨다.
우린 허락을 받기 위해 나름의 브리핑을 했다. 이야기를 들으시고, 당연하게도 허술한 우리의 계획을 평가하셨다.
‘우선 식사를 어떻게 해결할 건지 전혀 계획이 없는데 며칠 동안 라면만 먹을 수도 없고, 계속 사 먹기엔 관광지의 물가가 비싸단다.‘
‘뭔가 목적이 있어야 할 텐데, 아무리 바닷가라고 해도 해수욕을 매일 할만하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5일이라는 기간은 생각보다 길고 너희가 예측하기 어려운 위험요소가 많다.‘
우리 친구들 중에는 꽤나 성적도 좋고 우등생인 아이도 있었고, 늘 리더십을 발휘하는 언변 좋은 친구도 있었지만 아무도 이렇다 할 변론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처음의 시도는 좌절되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고2정도 되면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나는 아버지가 허락하셨다고 여겼다. 고 2만 되면 되니까.
명분은 두 가지였다. 말씀하셨던 고 2가 되었고, 아버지가 말하신 계획적인 친구들로 멤버들이 전부 바뀌었다. 세상이 변해도 우리 우정은 변치 밀자던 중2 때의 친구들은 고등학교가 서로 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친구가 전부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던 어른들의 말이 이루어졌다.
아버지는 준비를 철저히 시키셨다. 역할분배. 회계를 맡은 친구는 예결산을 관리했다. 식단을 맡은 친구는 실제로 김치찌개 비슷한 걸 만들어 냈다. 액티비티를 담당한 친구는 정말 끝이 없이 무언가를 제안했다.
‘저 앞에 있는 섬에 갔다 오자, 튜브가 두 개 있으니까 4명이 올 때 한번 갈 때 한 번씩 쓰고 나머지 차례엔 수영을 하면 돼.’
신기하게도 나는 뭘 맡았는지 기억이 안 난다.
식단을 짜고 식자재를 미리 구매해서 들고 갔다. 짐은 어마어마했다. 식자재만 두 박스였다. 각자 배낭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어려울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럽배낭여행을 가도 그렇게 챙겨가지 않을 무게였다. 거기에 통기타도 하나 추가였다. 이 멤버가 나중에 대학생이 되어 정말 형편없지만 밴드를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나름대로 음악 마니아인 우리는 기타를 빼놓고 갈 수는 없었다. 정작 바닷가에서 기타를 친 시간은 30분이 안되었지만 말이다.
이 친구들은 그래도 제대하고 대학교 졸업 전까지 교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졸업 후로는 점점 달라지는 각자의 활동반경과 삶의 스타일이 친구들 간의 공통분모를 줄여갔고, 결국 연락처 속의 친구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그나마 그중에 한 명은 일 년에 한 번쯤 연락정도는 하긴 한다.
인생의 첫 캠핑을 같이 이뤄낸 친구들이었고 그때는 그게 엄청난 도전이어서 꽤나 우정을 과시하던 4인방이었는데 지금은 그때 건진 사진 4장이 전부다.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사진이라도 많이 남겼겠지만 당시에는 필름카메라뿐이었고 그마저도 익숙지 않아 건진 사진 몇 장 없는 추억이 돼버렸다.
지금은 일 년에도 몇 번 강릉 바닷가를 가곤 한다. 그리고 변하지 않은 그 수평선을 볼 때면, 고 2 때가 생각나기도 한다. 그리고 이제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게 되다 보니 가끔 생각해 본다.
‘나는 아이들이 몇 살 때 강릉여행을 허락해 줄 수 있을까?‘
적어도 중 2 때는 허락하지 않을 것 같다. 고 2 때도 자신은 없다. 아버지는 그때 허락은 하셨지만 며칠을 한숨도 못 주무셨다고 하셨다. 고등학생은 그런 시기인 것 같다.
충분히 크지 못했는데
충분히 컸다고 느껴지는 시기
어찌 됐든 그런 시기들을 거쳐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반대의 상황이 되었다. 나는 충분히 크지 못했다고 느끼는데 사회에선 충분히 컸다고 말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