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의 것들
중학교를 입학해서 처음 만난 담임선생님은 인생을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다. 영어 선생님이셨다. 그리고 열정적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같은 월급 받고 그렇게 까지 하셨을까? 하는 일들이 많았다. 초등학교 시절 이후로 담임선생님들과의 거리가 먼 채로 살아온 나의 트라우마를 치유해 준 분이다.
우연히 극적인 한 표 차이로 반장이 되었다. 장난 삼아 추천한 친구덕에 출마를 했고, 나에 비해 이미 인지도 충만한 다른 후보와 막상막하의 접전 끝에 선출이 되었다. 개표직후 한 유권자 친구가 소리 질렀다.
‘아! 나 쟤가 ’글치‘인지 알았어, 이름을 바꿔 썼네 ‘
담임 선생님은 선거의 시종을 꽤나 진지하게 진행하셨다. 중간중간 민주주의의 개념들을 설명하시면서 의미부여를 해주셨다.
‘그래서 유권자는 후보들을 잘 살펴봐야 해요. 잘 못 알았어도 한번 던진 표는 무를 수가 없어요. ’글치‘가 당선 되었습니다.’
해프닝처럼 당선된 나는 어리둥절하게 반장을 시작했다. 극히 내성적이었던 나는 하루하루가 도전이었다. 무언가를 위해 앞에 나갔을 때의 내가 마치 반장 연기를 하는 배우 같이 느껴졌다. 1학기는 그렇게 어리숙한 반장으로 보냈다. 담임선생님은 늘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진행하셨다. 419엔 뜻이 있는 반친구끼리 419 기념탑에 가기도 하고, 임원들이 단합해야 한다며 소규모로 방과후에 올림픽 공원에 놀러 가 단합대회를 하기도 했다. 점점 행사의 규모와 참여 범위가 넓어지더니 여름방학이 시작하기 전 선생님은 대규모 프로젝트를 제안하셨다.
학급 문집이라는 것을 만들자고 하셨다. 그러려면 반 친구들이 글을 써서 동참해야 한다. 담임선생님은 일기 쓰기를 제안하셨다. 신기하게도 우리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다소 불량기가 있었던 친구들도 쓰기 시작했다. 가장 큰 이유는 모든 일기에 담임선생님의 답글이 적혀있었다는 점이다. 매주 담임선생님에게 일기를 제출하면 읽어보고 각 사람에게 사랑이 담긴 답글을 적어 주셨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만나면 꼭 관련된 이야기들을 묻고 대화하셨다. 사춘기의 아이들이 고민 상담할 마땅한 방법이 없던 시절 담임선생님은 그 역할을 훌륭히 해내셨다. 더욱 신기한 건 학생들이 점차 올바른 방향을 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한 번은 전 학년을 통틀어 유행하던 도박성 놀이가 있었는데 이 놀이에 대한 학급회의를 열라고 하셨다. 찬반 토론형식으로 진행하라고 하셨다. 나는 반장이지만 이건 결과가 뻔하고 무슨 결론이든 아무런 구속력이 없는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선생님 소용이 있을까요?’
‘그래도 한번 해봐. 안 해보는 것보다 낫지’
회의 결과는 놀라웠다. 치열한 토론 끝에 이 놀이는 무익하다. 우리 반에서는 금지한다. 하고 싶다면 다른 반에 가서 하자.라고 결의가 되었고, 실제로 1학년 내내 지켜졌다. 회의가 의미 있을 수 있음을 경험한 첫 번째 일이었다. 그 뒤로 한참 동안 유사한 경험울 못했지만.
어찌 됐든 그렇게 특이한 반으로 변해갔고, 그만큼 아이들의 좋은 글들이 쌓였다. 진짜 문집을 만들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럼 누가 언제 만들지? 선생님은 자원하는 사람이 방학 때 모여서 만들자고 하셨다.
‘방학에! 학교에서?’
생각보다 자원자는 모이기 시작했고 어느새 나도 합류해 있었다. 방학 때 자주 모여서 기획을 하고, 글 씨 잘 쓰는 아이들이 원고를 썼고, 나는 나름대로 오디션을 거쳐 그림 잘 그리는 애로 분류되어 삽화를 그려 넣었다. 그렇게 해서 두툼한 문집 원고가 완성되었고 선생님이 어디선가 인쇄와 제본을 해오셨다. 너무 만족스러운 작업이었고 소중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소중한 기억이고 나의 삶에 하나의 큰 씨앗이 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언젠가 물난리 통에 책이 유실되어 지금은 나에게 없다는 사실이다. 아쉽다. 정말 소중한 글과 그림들인데. 하지만 나에게 뚜렷이 기억되어 있다. 그 표지의 노란색과 종이의 질감마저 기억이 난다.
이 글을 통해 담임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을 전해드리고 싶다.
당신의 열정과 사랑이
늘 기억 속에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