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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teBloomer Apr 24. 2019

사랑은 투자가 아니다

 사랑을 처음 ‘배울’ 때, 사랑은 감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 부모님을 좋아할 때, 같은 반 친구를 좋아할 때, 연인과 교제할 때 생기는 감정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벚꽃이 떨어지고 핑크빛이 왕왕 거리는 두근두근한 감정이 사랑이고 그 감정이 더 이상 들지 않으면 사랑이 식었다고들 한다. 사랑은 감정적인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의지적인 부분도 포함된다.

 실제 연구에서 연애결혼과 중매결혼의 행복도를 조사한 적이 있다. 다들 예상하다시피 연애결혼의 행복도가 중매결혼의 행복도 보다 점수가 훨씬 높았다. 그러나 10년 뒤에 이 차이는 역전된다. 중매결혼의 행복도는 연애결혼의 초기 행복도와 맞먹을 정도로 올라간다. (평균일 뿐이니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연애결혼한 부부는 사랑이 이미 완성됐다고 착각하는 반면, 중매결혼 부부는 사랑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사랑은 감정만이 아니라 함께 노력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고린도전서 14장 4-8절에 사랑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사랑에 대한 설명이 많이 적혀있지만 유독 한 구절에 눈이 갔다. 5절 중간에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구절을 읽으며 반성하게 된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라 하였는데 사랑을 마치 투자와 같이 생각하지 않았나 하고 말이다.

 거의 모든 부모님은 자식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사랑을 주시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다. 자식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되기 때문에 그 행복감을 위해 자식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고자 한다. 자식 사랑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 또한 누군가를 사랑하며 이것을 배웠다. 그저 상대방에게 기쁨이 되고자 하는 마음. 나로 인해 기뻐해 주면 그저 그것으로 끝나지 않은가.

 하지만 어느새 인가 그 초심을 잃고 만다. 어느 순간 내 머릿속에는 계산적인 생각이 피어난다. ‘내가 이만큼 해줬는데 왜 너는 이만큼 못해줘?’ 사랑은 주는 것으로 끝이다. 자기의 유익을 계산하고 주는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계약 연애를 하지 않은 이상, 받은 만큼 돌려주는 마음을 갖는 즉시 실망이 따라오게 된다.

 사실 이게 단순한 문제만은 아니다. 그리고 사람이 완벽할 수도 없다. 사랑을 받는 사람의 도리를 따지기 이전에 주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려 한다. 부모님께 받은 사랑이 크기 때문에 그것을 갚는 것은 사람의 도리이다. 군대를 기다려준 여자 친구에게 전역 후 잘해주는 것은 도리이다. 선배나 스승에게 대가 없이 받은 도움에 보답하는 것은 도리이다. 하지만 사랑은 투자가 아니라 바라지 않고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랑을 주는 사람은 그저 사랑을 받는 사람의 행복만을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깊이 있는 철학자도 아니고 경험도 없는데 사랑이라는 깊이 있는 주제를 논하기가 조심스럽다. 하지만 세상이 늘 사랑을 말하고, 사람들은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의미가 가볍다고 느껴졌다. 사랑은 희생과 오래 참음이 없이는 껍데기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먼저 이웃을 사랑할 때 바라지 말고 그저 주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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