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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teBloomer Sep 19. 2019

좋은 게 더 이상 좋은 게 아니다

경제화. 민주화. 그다음은 의식의 합리화.

"좋은 게 좋은 거다”


이 말은 보통 일이나 관계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가끔씩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자매품으로 ‘융통성’, ‘우리끼린데...’가 있다. 가까운 사이에 절차는 너무 따지지 말자는 말이다. 이 말을 써야 할 때가 있고 쓰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 나는 이 말이 지금 우리 사회에 남용이 되고 있어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선 이 말을 쓰는 동기를 봐야 한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말에서 좋은 것이 나에게만 좋은 것인지, 아니면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는 말이다. ‘다수결’이 민주주의의 원칙 중 하나라고 말한다.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도 다수결이 기반이 된 절차이니까. 하지만 민주주의가 다수결을 차용하는 것이 곧 ‘다수가 만족하면 소수를 희생시켜도 된다’라는 뜻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목소리가 많이 반영되는 건 사실이지만, 소수의 목소리도 어떻게든 반영하도록 설계되었다(이상적으로는). 다수가 만족하면 마치 정답인 것처럼 사용하는 제도가 아니다. 이처럼 웬만큼의 사람이 만족하는 방법이 있다고 소수의 의견을 묵살하는 것은 다수결이 아닌 폭력이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쩍 넘어가는 그런 식의 절차는 절차를 안 지킨 것만 못하다. 절차나 시스템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소수의 의견도 귀담아듣고 상처 받는 사람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분명히 절차가 존재하는데도 ‘좋은 게 좋은 거야’라는 말로 절차를 무시하는 선례를 남긴다면 그 이후에도 절차를 지키지 않을 가능성이 커진다. 절차 자체가 소수를 희생하게 만들어졌다면 합의를 통해 수정을 하면 된다.

나도 완벽한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70%의 만족을 71%의 만족으로 바꿀 수는 있지 않은가. '좋은 게 좋은 거야’라는 말로 은근슬쩍 넘어가도 된다면 일단 국회의원부터 다 없애야 한다. 맨날 사고만 치는 것 같이 보이는데 존재할 이유가 어디 있나. 쓸모없어 보이고 신뢰가 가지는 않지만 국회의원을 없애지 못하는 이유는 그럼에도 ‘절차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계속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거시적인 문제만 얘기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직장에서, 하다못해 학교 조별과제에서도 절차를 무시해 벌어지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조별과제 잔혹사’ 같은 패러디가 왜 나오겠는가. 절차와 약속이 있는데 그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이 나오기 때문이다. 지금은 내가 편하자고 살짝 눈 감을 수 있겠지만 결국 나에게도 그 피해가 돌아온다. 그 피해는 내가 누군가를 저격했기 때문에 복수의 화살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시한폭탄을 발견했을 때 즉시 처리하지 않아서 오는 피해다.




 혹시 오해를 할까 봐 한 가지 짚고 넘어가려 한다. 나는 절차 만능주의를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게 좋은 거지’하고 넘어가야 할 때도 있고 융통성을 발휘해야 할 때도 있다고 생각한다. 글의 처음에 밝혀두었듯이 이 말을 ‘남용’하는 것이 문제이지 절대적으로 절차만을 지키고 기계처럼 변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듯 균형이 중요하다.


 또 한 가지. ‘사랑’에는 모든 것을 뛰어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절차에는 ‘용서’가 있을 수 없다. 잘못을 했다면 그 책임을 지는 것이 절차이다. 하지만 사랑은 잘못을 했어도 용서한다. 사랑은 절차를 뛰어넘는다. 문제는 사랑이라는 명목 하에 행해지는 암묵적인 강요이다. 사랑은 주는 것이지 강요할 수는 없다.


 



 국회의원의 아들이 음주운전과 뺑소니를 저지르고 그 의혹을 덮으려 했다는 사건에서도, 대기업 회장의 딸이 사적인 목적으로 비행기 운행을 함부로 정지시키는 사건에서도, 가짜 뉴스를 퍼트리고도 정정보도나 사과를 하지 않는 언론을 보더라도 우리는 분노와 배신감, 실망을 느낀다. 절차가 뻔히 존재함에도 슬며시 눈을 감고 모른 척 넘어가 주는 후진국 마인드이다.


 우리 할아버지 세대는 광복을 이루셨고 한국 전쟁에서 나라를 지켜내셨다. 우리 아버지 세대는 경제화민주화를 이루어 내셨다. 이제는 우리 차례이다. 우리는 ‘의식의 합리화’를 이룰 차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가 하드웨어를 업그레이드시켰다면, 우리 세대는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할 차례다. 낡은 문화, 낡은 절차, 낡은 의식을 발전된 문화, 공정한 절차, 선진 의식으로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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