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 김영하
어릴 때부터 여행이 왜 재미있는지 잘 몰랐다. 막연하게 ‘여행은 즐겁고 좋은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형성되어 있었지만, 딱히 여행을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렇다 할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 그렇게 여행에 대한 생각이 없이 살다가 문득 보니 나 말고는 적어도 1-2년에 한 번씩 대부분 여행을 다녀오는 것 같았다. 그때까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이 떠올랐다. ‘여행이 뭐가 그렇게 재밌길래 저렇게 다들 못 가서 안달인 걸까’. 이 답을 찾기 위해 언젠가부터 사람들을 만나면 ‘여행을 왜 좋아하세요?’라는 공식 질문을 한다.
사람들마다 답은 다 다양하다. 친구들과 추억을 쌓는 게 좋다는 사람이 있고(이런 사람이 혼자 여행을 갔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다),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어디로든 떠나는 사람이 있고, 새로운 먹거리를 즐기는 사람이 있고, 그냥 돈 쓰는 게 좋은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여행을 가고 싶게 만드는 그런 설명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직까지 그 답을 얻지 못한 채 이곳저곳 ‘여행 동냥’을 다닌다.
나는 김영하 작가를 좋아한다.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은 딱 하나 밖에 읽어보지를 않았지만, 예능이나 강연에서 들려주는 그의 사상이 매력적이다.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신선한 생각을 하게 해준다. 이런 사람은 ‘여행의 이유’에 대해 뻔하지 않고 독특한 설명을 줄 것만 같았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p.58)
작가는 ‘성공적인 여행’이란 역설적이게도 ‘실패한 여행’이라고 말한다. 계획한 것을 모두 성취하는 여행은 기억에도 남지 않고 어떤 깨달음을 얻지도 않는다.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계획에서 벗어나고 예상 밖의 일이 터지는(도둑을 맞거나 기차를 놓치거나 시간을 잘못 알거나) 일을 겪기 싫어한다. 하지만 그런 여행에서 자신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을 수도 없다. 인생은 여행과 비슷하다고 하지만 차이가 있다. 인생은 죽기까지 계속 이어지지만 여행은 돌아오면 끝이 난다. 고생을 해도 돌아오면 재밌는 추억이 될 뿐이다. 실패를 크게 하면 할수록 추억과 경험이 비례해서 커진다.
일상에서 우리는,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통제력을 조금씩 잃어가는 느낌에 시달리곤 한다. 조금씩 어떤 일들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 여행자는 그렇지 않다. 떠나면 그만이다. 잠깐 괴로울 뿐,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다. 그렇다.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p.219)
내 친구는 언젠가 여자친구와 1박 2일 제주도를 갈 계획을 세웠다. 맛집도 알아보고 숙소도 예약하고 관광지도 PPT까지 만들어가며 ‘완벽한 여행 계획’을 세웠다. 아침에 일어날 때까지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날씨도 완벽했다. 하지만 문제는 공항에서부터 시작됐다. 표를 끊고 탑승을 하려고 보니, 이런! 지갑을 두고 온 것이다. 돈이야 여자친구도 있고 요즘은 핸드폰으로 결제를 할 수 있으니 문제가 안 된다. 문제는 신분증이다. 비행기를 탈 때 신분증이 없으면 절대 태워주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내 친구는 여자친구만 혼자 제주도로 보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제일 빠른 비행기가 8시간 뒤에 있어서 집에서 한숨 푹 자고 저녁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이렇게만 보면 이 여행은 실패한 여행 같아 보인다. 이틀 중 하루의 대부분을 날렸으니 실패도 이런 처참한 실패가 없다. 하지만 내 친구는 그때 제주도 여행 얘기만 나오면 신분증 얘기 밖에 안 한다. 다른 계획은 너무 ‘성공적’이어서 크게 기억에 남지 않았나 보다. 신분증을 안 들고 온 것이 당시에는 여자친구에게나 본인에게나 얼마나 큰 좌절을 느끼게 되었겠는가. 하지만 그때뿐이다. 그것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오히려 다음 여행에는 신분증만은 꼭 챙기는 교훈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실패한 계획이 지금은 그 여행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아직 여자친구랑도 잘 사귀고 있다.
대부분의 여행기는 작가가 겪는 이런저런 실패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획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오는 그런 여행기가 있다면 아마 나는 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을 것이다.(p.19)
또 한 가지 공감이 갔던 대목은, 바로 일상을 잊기 위해 떠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스트레스 해소 방편으로 ‘명상’을 꼽는 이유가 뭘까. 명상을 하면 후측대상피질의 활동이 감소하고 어쩌고 하는 것은 일단 집어치워두자. 간단히 말해서 명상은 ‘미래를 잊기 위해’ 하는 것이다. 사람의 뇌는 항상 시뮬레이션을 하느라 바쁘다.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 ‘내 성적이 안 좋아서 이번 장학금에서 탈락하면 어떡하지’, ‘아까 김치찌개를 허겁지겁 먹었는데 이빨에 고춧가루가 껴있으면 어떡하지’. 전부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일어난다. 명상은 오로지 ‘현재’에 집중하게 만들어 준다. 지금의 내 호흡과 느낌을 온전히 느끼며 걱정을 내려놓고 스트레스를 관리하게 되는 것이다.
여행도 이와 같다. 바쁘고 걱정되는 일상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게 여행이다. 여행을 가면 ‘현재’에 오롯이 집중할 수밖에 없게 된다. 여행을 떠나 직장 걱정을 하기는 힘들다. 오늘 저녁은 제대로 먹을 수 있을지, 기차 시간에는 안 늦게 도착할지, 인터넷으로 찾아본 그곳이 아직도 있을지 등등. 그리고 여행지의 고민은 여행지에 놓고 올 수 있다. 돌아올 때면 여행지에서 있었던 일들은 모두 미화된 추억이 된다. 싸우고 짐을 잃어버려도 거기서 끝이다. 여행은 내 ‘껍데기’를 잊게 만들어 준다. 작가의 말처럼 여행은 ‘나를 잠시 잊으러’ 떠나는 것인 것 같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p.194)
이 책을 읽고 문득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의 처음에서 밝혔듯 나는 아직도 여행 동냥을 다닌다. 그런데 어쩌면 그 답을 찾기 어려운 이유가 여행에 대한 내 고정관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라면은 어떤 라면일까? 신라면? 진라면? 너구리? 짜파게티? 아니면 새벽 한 시에 먹는 라면? 물놀이 후에 먹는 라면? 술 많이 먹고 다음날 아침에 먹는 해장라면? 동생이 끓인 라면을 뺏어 먹는 것? 내가 갑자기 라면 얘기를 하는 이유는, 결국 이 답은 ‘취향’의 문제라 답을 내릴 수 없다. 100명 중 99명이 다 같은 답을 내린다고 나머지 1명의 답이 틀린 것이 아니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각자의 개성과 기호, 취향에 따라 여행에서 얻는 것, 바라는 것은 달라질 것이다.
나는 어리석게도 여행을 가는 것에 대한 한 가지 정답이 있다고 전제하고 있었다. ‘여행을 왜 가는가’에 대한 일반적인 ‘정답’을 찾기보다 ‘내가’ 여행에서 얻는 것은 무엇인지를 물었어야 했다. 그리고 직접 여행을 가야 한다. 하루 종일 어떤 라면이 맛있는지 고민한다고 내가 어떤 라면이 제일 좋은지 알 수 없다. 하나하나 먹어보며 내 취향이 어떤지 알아가야 한다.
여행에는 필요한 준비물이 딱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돈과 시간과 ‘용기’. 사실 용기만 있으면 돈과 시간은 어떻게든 준비할 수 있다. 여행에 대한 로망이 딱히 없어서 돈을 모으고 시간을 내고 또 용기를 낼 동기가 없기는 하다. 하지만 한 번 사는 인생, 다른 사람들이 다 즐기는 여행의 재미를 나만 모른다는 것은 억울하다. 하지만 작은 여행이라도 시도해보지 않으면 절대 답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여행의 동기를 차곡차곡 쌓아본다.
인간은 왜 여행을 꿈꾸는가. 그것은 독자가 왜 매번 새로운 소설을 찾아 읽는가와 비슷할 것이다. 여행은 고되고, 위험하며, 비용도 든다. 가만히 자기 집 소파에 드러누워 감자칩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 게 돈도 안 들고 안전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p.221)